관련글 : [그여자와 책] - 무인도에서의 인간 한계에 도전하다.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봤을, 설령 읽어보지는 않았을지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인물, 로빈슨 크루소. 나 역시 어릴 때 그의 모험 이야기를 몇번씩 읽어봤었다. 어릴 때 남자들이라면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모험 이야기에 관심을 안가질 수 없지 않을까. 요즘 애들은 안그러려나.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읽었던 로빈슨 크루소는 아마도 축약본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고. 그렇지만 워낙 유명한 소설이다보니 이미 여러 출판사에서 완역본이 나와있다. 내가 이번에 읽은 것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판본이다.

소설 자체는 이미 유명하기도 하고, 그여자 Gene께서 잘 요약해주셨기에 내용은 굳이 또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니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보자. 

로빈슨 크루소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대니얼 디포 (을유문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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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을 담당한 번역자는 윤해준 교수이다. 책 정보를 조금만 찾아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읽다보면 원작에 충실하게 번역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띠지에도 로빈슨크루소 작품에 대한 설명 대신 '영미문학연구회 선정 최고의 역자가 원작의 감동을 되살린 유려한 번역'이라는 문구가 들어있다. 책을 폈을 때 처음 눈에 띄는 것은 문장 하나하나가 긴 편이라는 점이다. 디포가 원작을 영어로 쓸 때 관계대명사, 부사를 붙이고 붙이며 길게 문장을 썼던 것 같은데(사실 원문을 보지 않아서 모르긴 하다만) 이것을 우리말에서 읽기 편하게 조각내지 않고 그대로 번역하였다. 어찌보면 우리 말에서는 읽기 불편하거나 어색하기도 하다. 예를 들면 책의 첫 문장이자 문단은 다음과 같다. 

나는 1632년에 요크 시에서 태어났는데, 집안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원래 그 지역 출신은 아니었으며, 아버님은 브레멘에서 온 외국인이었는데 처음엔 헐에 정착했다가 장사를 해서 쓸 만한 재산을 모은 다음엔 사업을 그만두고 이후에 요크에서 사시다 거기서 어머니와 결혼하셨는데, 외가 쪽은 그 지역의 제법 괜찮은 집안으로 성이 '로빈슨'이라, 내 이름을 '로빈슨 크로이츠네'라고 지으셨던터, 하지만 영국에서는 늘 그렇듯 말의 원음이 변질되어 우리집 성은 남들이 부르는 대로 그냥 '크루소'로 쓰기로 했으니, 내 동료들은 나를 늘 이렇게 불렀다. 


또 한가지 원본을 따르다보니 특이한 점은 전체가 하나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장의 구분이 전혀 없다. 어릴 때 읽었던 책은, 이를테면 로빈슨의 첫 항해, 조난, 탈출, 두번째 항해..등을 각각의 하나의 장으로 구분하여 두었다. 하지만 디포의 원작에서는 이런 구분이 없기 때문에 을유세계문학전집의 로빈슨크루소도 장의 구분 없이 소설 전체가 하나의 장으로 묶여있다. 이런 점도 어찌보면 독자를 조금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일 수 있을 것이다. 이쯤되면 책의 제목을 '요크 출신 뱃사람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도 놀라운 모험'이라고 적지 않은 것이 의아해진다. 

또 하나 다른 번역본들과 비교해 특이한 점이 있는데 로빈슨이 구해준 토인의 이름이다. 사람 이름은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원작 그대로 '프라이데이(프라이디로 된 책도 봤었다)'로 적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원작을 충실히 따르던 이 책은 오히려 이것을 '금요일'로 번역하였다. 로빈슨이 토인을 'Friday'로 이름 붙인 것은 그를 금요일에 구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본에서 그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로 번역하면 금요일이라는 의미가 줄어들지 않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톨킨이 그의 작품을 타언어로 번역할 때 고유명사들의 발음을 그대로 쓰지 말고 현지 언어로 바꾸라고 했던 요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하면 우리말로 원작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의 답 중 하나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금요일'이라는 번역이 앞서 언급한 긴 문장이나 장의 구성과 같은 것들보다도 띠지에 적힌 '원작의 감동을 되살린 유려한 번역'이라는 수식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번역 이야기를 제외하고, 어릴 때 읽던 축약본과 비교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소설 내의 종교적인 분위기이다. 어찌보면 로빈슨 크루소라는 한 인간이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라기보다 신을 믿지 않던 로빈슨 크루소가 독실한 신자가 되는 이야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내용은 그저 신을 믿고 찬양하게 만드는 하나의 시련일 뿐이고. 

이제 나는 내 삶의 형편을 처음보다 그 자체로는 훨씬 더 편리하게 만들어놓았고 내 몸도 그랬지만 내 마음도 훨씬 더 편해졌다. 나는 음식을 앞에 두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경우가 잦아졌고 이 광야에서 이런 성찬을 즐기게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손길에 탄복을 하곤 했다. 나는 내 처지의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바라보며 내게 없는 것보다 내가 향유하는 것들이 뭔지 따져보게 되었고, 이것이 때로 내게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은밀한 위안이 되었으니, 이런 얘기를 이 대목에서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바를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지 못하며 불평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데, 이들은 주시지 않은 것들을 보면서 그걸 탐하기 때문인 바, 이렇듯 우리가 가진 게 없다는 불만은 모두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가진 바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결여된 데서 비롯되다는게 내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로빈슨이 신에 대한 찬미와 경배를 하는 부분이 많기는 한데 스토리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보니 축약본을 만들 때 가장 쉽게 뺄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치 레미제라블에서 스토리와 직접 연관이 없는 온갖 내용들이 빠졌던 것처럼. 

로빈슨크루소의 원작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강추. 
인간의 의지와 모험, 생존에 대한 열망을 느끼고 싶다면 추천.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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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춘한삼 2013. 8. 8. 19:23
로빈슨크루소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대니얼 디포 (을유문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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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유명한 책이라 설명하기도 입 아프다는...

스포일러 내용 포함..


무인도에서 지내는 로빈슨 크루소의 생활은 인간의 지혜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정말 존경하고 싶을 정도.

사람의 목숨이라는게 참,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라는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6. 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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