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를 통해 고대 그리스인과 신들에 대해 알아 봤으니 이제는 현대 그리스를 돌아본 여행기를. 뜬금없다 싶어서 꼭 지금 사봐야 할까..하는 생각에 구입을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제대로 읽게 된 박경철의 첫번째 여행기, 문명의 배꼽 그리스. 완결이 되면 볼까도 했지만 한두권 나오고 마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언제 완결이 될지도 까마득하다보니 결국은..

이전에 한번 저자에게 그리스 여행에 대해 직접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ppt까지 준비해와서 표지를 띄워놓았던 시골의사는 관객들 중에 학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며 즉석에서 주제를 바꾸어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부터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 어린 시절의 심리, 이를 통한 바람직한 교육에 대해 강연을 했었다. 어찌보면 그 때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것이 다행으로 생각된다. 여행기는 책을 통해 대강의 내용을 알 수 있지만 당시 들었던 저자의 경험은 그 기회가 아니면 들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배꼽, 그리스 (박경철그리스기행1)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박경철 (리더스북,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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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과 같은 전작들에서 보여준 인간적이면서도 맛깔나는 시골의사의 문체와 더불어 여타 여행기와의 차별성은 '니코스 카잔차키스'다. 책의 서문에서부터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이십대의 청년이 가슴에 새긴 꿈을 나이 오십을 앞두고 실현한 긴 여행의 기록'이다. 이십대의 청년의 가슴에 꿈을 새기게 만든 인물이 바로 니코스 카찬차키스였다. 서문을 통해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의과대학을 다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이란 무엇인지, 육신을 넘어 영혼에까지 생기를 불어넣는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아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가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조화를 이루며 쌓아 올린 문명과 역사의 참모습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새 인류가 오랜 역사를 통해 스스로에게 던진 그 오래된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이 어떠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온갖 책들을 전전하며 가슴앓이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단골 책방의 서가를 둘러보던 그 청년은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라는 책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이름도 낯선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 그리스 작가의 책을 산 청년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단숨에 읽어버립니다. 작은 불씨가 큰 산을 태우듯, 책을 읽어가면서 그의 가슴에는 점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불이 일었습니다. 마침내 그 뜨거운 불길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혼자 떠나 혼자 떠도는 여행이었지만 저자는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 항상 그의 옆에는 카잔차키스가 함께하며 때로는 조언을, 때로는 설명을. 카잔차키스는 옆에 있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친구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카잔차키스의 무덤에서 제를 올리던 저자에게 관심을 보이던 택시기사는 카잔차키스가 그의 영웅이라는 저자의 말에 자신의 친구인 카잔차키스의 또다른 친구과 아낌없이 우정을 쌓는다.

그리스인들에게 우정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같이 사랑하고, 내가 살아가는 곳에 같이 살아가고, 내가 아끼는 것을 같이 아끼는 사람. 그것이 친구이고, 친구에게는 모든 선의를 베풀어야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인들의 명예의 한 축을 담당하는 '우정'이란 말의 의미다. 이 우정은 곧 명예고, 거기에 용맹을 더하면 탁월함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명예를 누구보다 드높인 사람들, 그들은 '영웅'이라 부른다.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나라, 다른 사회를 접하게 되면 어느 것 하나 정도는 부럽다는 감정을 가지곤 하게 된다. (물론 예외는 있다) 저자의 경험을 통해 느낀 그리스에 대해 부러운 것은 바로 이런 점이다. 처음보는 타인과 공감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을 믿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얼마전 우리나라의 사적 신뢰지수가 OECD에서 최하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은 타인을 신뢰하십니까' 이런 문항에 대한 답을 통해 신뢰도를 조사하는건데 신뢰한다는 응답이 10명 중 3명이 안됐던걸로 기억한다. (정부 공적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말할 것도 없다) 분명 그리스도 경제 문제도 있고 하니 최하위권일텐데. 입장을 바꿔서 우리도 그리스인 택시기사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행동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아마 말조차 걸지 않거나 공공장소에서 이상한 행동을 한다며 신고를 하지 않아도 다행은 아닐까.

글 이 옆으로 조금 새기는 했지만 박경철이 경험한 그리스도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경제 상황 때문에 불법체류 중인 외국인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태도를 가진 극우파들도 흔히 볼 수 있는 듯 하고, 과거에 영광을 누렸던 도시들이 유적조차 제대로 관리되거나 남아있지 못한 것을 보면 한탄이 나오기도 한다.

크레타 섬에서 카잔차키스를 매개로 나누었던 우정을 제외하면 아직은 코린토스나 스파르타 같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만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몇 개 도시와 유적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스에 대한 많은 것을 보여준다. 나도 저자처럼 가슴에 그리스와 카잔차키스, 시골의사를 품고 함께 다음 여행지로 떠나길 기다려본다. 신들이 잠들어 있는 그곳으로.
by 청춘한삼 2014. 6. 6. 20:30
관련글 : [그여자와 책] - 산을 탐독하라.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이하 유럽산책)' 이후 두번째 읽는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다. 책에 대한 전반적인 평이나 유명세가 '유럽산책'보다 좀 더 좋은 편인 듯 해서 벼르고 있다 보게되었다. 이전에 Gene이 쓴 글에 나온 것처럼, 그리고 아래 책 소개에 나와있듯이 이번에는 빌 브라이슨이 애팔래치아 산맥 트래일 종주를 시작했다.
 

'유럽산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을 떠나는 거창한 목적은 없었다. 물론 여러 구실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시작은 다음에 나오는 것처럼 단지 집 근처에 트레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뉴햄프셔 주의 작은 마을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돼 우연히 마을 끝에서 숲으로 사라져 가는 길을 발견했다.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었다. 그 유명한 '애팔래치아 트레일'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 트레일은 장거리 종주 등반의 원조로 불린다. 미국의 동부 해안을 따라 고요히 솟아 있으면서 은근히 사람의 발길을 부르는 애팔래치아 산맥 위로 굽이굽이 3천360킬로미터나 흐르는 길이다.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까지 14개 주를 관통하면서 이름만 들어도 맘에 설레는 블루리지, 스모키, 컴벌랜드, 그린 마운튼, 화이트 마운튼을 지나간다.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튼'이라든지 '셰넌도어 국립공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주의자 존 뮤어가 표현한 대로 빵 한 덩어리와 차 한 봉지를 낡은 배낭에 넣고서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달려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내가 막 정착한 뉴잉글랜드의 조그만 마을에 뜻하지 않게도 이 트레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이 길을 따라 조지아 주까지 2천880킬로미터를 걸어서 가거나, 또는 반대방향을 택해 거칠고 돌이 많은 화이트 마운튼을 따라 720킬로미터를 걸어서 몇 사람 경험해보지 못한 전설적인 마운트 캐터딘 산을 밟아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뜨거워졌다. '근사하지 않은가. 당장 바로 하자'는 충동이 불끈 솟았다. p.13-14

이렇게 시작된 트레일 종주에는 '유럽산책'에서도 저자의 추억 속에 등장했던 친구인 카츠도 함께 한다. 십수년 만에 다시 만나서 처음엔 어색하고 서로 맞지 않지만 점점 서로에 대한 믿음과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카츠 외에도 메리 앨런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만나 고생을 하기도 하고 서로 도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내 앞에 펼쳐진 새로운 길 앞에서 그 여행이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여행의 한가지 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잡학다식한 빌 브라이슨답게 이 책에서도 자신의 박식함, 혹은 박식해보이는 능력을 뽐낸다. 물론 소재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이다. 트레일의 위험요소인 흑곰이나 그 외에 트레일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동물들, 트레일의 역사와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 생각과 잘 버무려 풀어낸다. 또한 트레일 관리를 맡은 공원관리국의 공원파괴 행위라든가 하는, 트레일과 트레일하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행정, 관리 부실 등에 대해서도 제 목소리를 낸다. 개발구역도 아닌 자연보호 공원에서 자연파괴가, 그것도 공원 환경을 보호해야 할 공원관리국에 의해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데 내용을 조금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도롱뇽보다 더 다양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종이 '민물 홍합'이다. 세계 전체의 3분의 1인 300종의 홍합이 여기에 서식한다. 스모키 홍합은 자줏빛 사마귀 등, 빛나는 돼지 발톱, 원숭이 얼굴 진주 홍합과 같이 괴이한 이름들로 불린다. 불행히도 그들에 대한 관심은 이것으로 끝이라는 점, 심지어 자연주의자들로부터도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홍합은 놀라운 속도로 사라져갔다. 스모키 홍합종의 거의 절반이 멸종 위기에 있으며, 12종은 이미 소멸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자연보호 공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놀랄 만한 일이어야 한다. 홍합들이 알아서 지나가는 차에 돌진해 바퀴 밑에 깔리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모키는 대부분의 홍합을 잃어버리는 과정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실제 국립공원관리국은 뭔가를 멸종시키는 게 전통인 듯 싶다. 브라이스캐니언 국립공원은 아마 가장 흥미로운 사례일 것이다. 1923년에 창설된 이 공원은 자신이 관리를 시작한 지 반세기도 안되어 7종의 포유류 - 흰꼬리 산토끼, 들개, 영양, 날라다닐 수 있는 다람쥐, 비버, 붉은 여우, 점박이 스컹크-가 멸종되었다. 이런 동물들이 브라이스캐니언에서 공원관리국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기 전 수백만 년을 생존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으로 놀라운 업적이다. 모두 함께 42종의 포유류가 20세기에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멸종되었다. p.149

물론 트레일을 걷는 동안 이런 설명만 늘어놓지는 않는다. 빌 브라이슨답게 책 곳곳에 유머가 도사리고 있고, 여행기답게 트레일을 걷는 동안 자신 앞에 펼쳐진 놀라운 자연을 보고 감탄하며 즐기기도 하고, 힘들어 불평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힘들어하는 시간이 길었던 브라이슨과 카츠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을 느끼고, 나중에는 오히려 도시에서 더 낯설고 어색함을 느끼기도 한다.

죽을 고비까지 넘겨가며 힘들게, 그리고 의외로 열심히 트레일을 걸었던 저자와 카츠의 모습을 보다보면 도시를 떠나고 싶어하는 현대의 도시인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유행이 된 캠핑은 이런 욕망을 가장 현실적으로 해소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주말에 잠시 교외나 캠핑장으로 캠핑을 가는 심리에는 언제든 다시 익숙한 도시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생각이 깔려있다. 하지만 브라이슨과 카츠는 훨씬 더 긴 시간을, 산속에서의 캠핑이 그들의 새로운 일상이 될 정도를, 산속에서 보냈다. 비록 완주를 하지도, 모든 경로를 걸어간 것도 아니지만 진짜 도전을 한 것이다. '유럽산책'에서도 그랬지만 브라이슨의 여행기에서는 언제나 '도전'이 있다. 카츠와 함께 유럽여행을 한지 20년 만에 혼자 유럽 곳곳을 걸으며 여행했었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카츠와 함께 3천 킬로미터가 넘는 트레일에 나선다. 그것도 뚱뚱한 중년이 되어서.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애팔래치아 산맥이었다.(물론 '나를 부르는 숲'이라는 제목은 국내 출판사에서 지은 것이다만) 브라이슨 외에도 나를 비롯한 누구에게나 '나를 부르는 어딘가'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머리 속에 많이 떠올랐던 장소는 제주도 올레길이었다. 완전히 산 속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시숲의 길도 아니다. 산도 있고 바다도 있다. 자연 그대로 보존된 곳도 있지만 사람이 사는 지역도 지나간다. 브라이슨 표현에 따르면 '인간세계로부터 보호된 복도'가 아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세계도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곳이다. 언제쯤 가볼지 확실히 알수는 없지만 시간을 잘 정해서 내 앞에 놓인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 때까지 파괴되지 않고 잘 보존되길 바라고, 올레길을 가기 전엔 부산의 문탠로드나 이기대를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다.

트레킹을 좋아한다면 강추.
자연을 즐기는 여행을 좋아하고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추천.
빌 브라이슨의 다른 여행기를 재밌게 읽었다면 추천..하지만 '유럽산책'만큼의 개그와 말장난은 없는 듯.
뚱뚱한 중년 아저씨들의 도전과 모험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추천.

덧. 번역이 잘못된 것 같은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만든 사람 중 한명의 이름이 '매카이(p.50)'와 '매카이에(p.230~)' 둘로 혼용된다.
덧2. 이 책이 교양과학으로 분류된 건 아마 분류하는 사람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보고 같은 저자이니 읽어보지도 않고 같은 분류로 넣어버린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그래도 과학책은 아니지 않나.

by 청춘한삼 2013. 10. 3. 18:31
관련글 : [그여자와 책] - 발칙하다 못해 유쾌하다! 발칙한 유럽산책

그여자 Gene이 썼듯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이하 유럽산책)'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에 소개되었다. 이전에는 빌 브라이슨이 쓴 책 중에서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만 보았었기 때문에 그를 대중과학서 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유럽산책'을 포함해 여러 기행문을 써온 여행작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팟캐스트를 통해 책의 일부 내용을 접하니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했다. 드라이하게 적긴 했지만 팟캐스트에서 읽어준 부분이 너무 재미있어 하도 여러번 듣다보니 어느 정도 내용을 외워버렸을 정도이다.  

'유럽산책'은 제목부터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이 아니라 '빌 브라이슨 유럽산책'으로 지어져 왜 관사를 넣지 않았을까 의문을 자아낸다. 하지만 번역본 제목은 빌 브라이슨이 정한 것이 아니라 출판사(21세기북스)에서 정한 것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번역된 빌 브라이슨의 다른 저서들 - 미국산책, 영국산책, 미국횡단기 등등 - 을 보면 마찬가지로 관사 '의'를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왜 그랬는지 궁금하다. 난 출판사 관계자를 알지 못하니 아마 평생 모르고 넘어가겠지.  

빌브라이슨발칙한유럽산책
카테고리 여행/기행 > 해외여행
지은이 빌 브라이슨 (21세기북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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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산책'을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로는 팟캐스트에서 읽어준 예테보리편과 피렌체편 일부의 내용과 표현이 내 취향에 딱 맞았다는 점과 더불어 작가는 도대체 왜 여행을 떠났을까..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목적으로는 휴식을 바라거나 뭔가 새로운 것을 얻고자 하거나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감탄하기 위해서와 같은 어떤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 팟캐스트에 소개된 내용만으로는 왜 작가는 굳이 집을 떠나서 여러 일을 겪으며 투덜거리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었다. 역시 책에는 왜 본인이 여행을 떠났는지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빌 브라이슨이 밝힌 여행의 목적을 포함한 두 부분을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런던에 있을 때 유럽 여행을 한 다음 책을 쓸 거라고 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시나 보군요."
"아니, 영어밖에 모르는데요." 
내가 모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그것이 외국 여행의 묘미다. 나는 여행지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다.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것보다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을 자아내는 일이 어디 았을까. 여행자는 갑자기 다섯 살짜리 어린이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존재 자체가 연이은 추측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p.54)


함메르페스트는 준비 운동치고는 다소 오래 걸린 감이 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할 참이다. 나는 돌아다니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니면서 영국에는 도저히 들어오지 않을 영화의 포스터도 구경하고 움라우트(독일어의 특수 기호)와 세디유(대개 c 밑에 붙는 s 모양의 기호)가 잔뜩 붙은 각종 상품과 상점 안내문, 그리고 주차금지 표지판 비슷하게 생긴 문자를 신기한 듯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그 나라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전혀 히트할 가능성이 없는 대중가요도 듣고, 나와는 평생 연이 닿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전화 박스 사용법부터 저 식품의 정체가 무엇인지까지 도무지 친숙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국적인 곳에 가고 싶었다.
낯선 곳에서 어리둥절해하는가 하면 매료되기도 하고, 실타래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근사한 대륙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싶었다. 기차를 타고 한시간만 가면 주민들의 말도, 음식도, 업무 시간대도 다르고, 주만들은 한 시간 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너무나 다른 삶을 살면서도 묘하게도 비슷한 곳, 나는 이런 근사한 대륙의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p.57)


어느 순간 갑자기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다섯 살까지 어린이가 된 듯한 느낌을 받고, 친숙한 것이라곤 없는 이국적인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 생각보다는 평범한 이유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건 빌 브라이슨은 이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빌 브라이슨은 여행 도중 여러 황당한 일들을 겪으며 시종일관 투덜거리거나 빈정거리고 풍경이나 분위기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유럽 대륙 북쪽 끝자락의 함메르페스트에서 오른쪽 끝인 이스탄불까지를 여행한다. 빌 브라이슨의 글의 힘에 더해 번역자의 능력 덕분에 Gene이 썼듯이 책을 읽다보면 작가와 함께 유럽 어딘가를 함께 거닐고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내가 가본 적은 없고 이후에 가보더라도 20년 전(정확히는 1990년)에 빌 브라이슨이 걸었던 곳과는 절대 똑같지 않을 유럽의 도시들이지만 그 도시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멋진 사진을 찍고 어디에 가서 뭘 보고 뭘 먹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며 '나는 이렇게 멋진 곳에 잘 다녀왔으니 너도 나와 똑같이 해보렴'이라고 말하는 여행책들 보다는 이런 책이 진정한 여행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뒷표지에 있는'여행 정보가 아니라 여행의 재미를 준다'는 문구가 이 책의 특징을 가장 잘 말해주는 듯 하다. 

유럽여행, 여행기를 원한다면 추천.
풍자와 돌직구의 향연을 원한다면 강추.
재미있는 책을 원한다면 추천.

 
by 청춘한삼 2013. 4. 28. 15:40
내가 가지고 있는 소망 중에 하나는 내가 살 집을 지어서 사는 것이다. 집이 너무 클 필요도 없고 적절한 사이즈의 마당이 있는 주택을 지어서 사는 것이 꿈이다. 그러려면 우리나라에서는 단독주택에 대한 관심과 배려, 시장이 더 커져야 하지 않을까 싶긴한데 몇년 전부터 땅콩집을 필두로 한 단독주택 바람과 아파트 시장의 침체를 생각하면 점차 주택(혹은 비아파트) 시장도 커질 것 같아 기대하고 있다. 

주택을 지으려면 건축가의 도움을 받지 않을수도 있지만, 사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하게, 내가 원하는 집을 지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지어서 내가 살지 않고 세를 놓을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살 것도 아니니 내가, 그리고 내 가족이 원하는 형태의 내외장을 가지는 집을 지으려면 아마도 복사한 듯 찍혀서 판매되는 설계도로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집의 구조나 형태를 확실히 결정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다양한 집에 살아보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할 형편은 못되기 때문에 간접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건축가, 특히 주택 전문 건축가가 직접 거장들이 만든 집을 방문하고 펴낸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집을 순례하다
카테고리 기술/공학 > 건축/인테리어
지은이 나카무라 요시후미 (사이,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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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인 저자는 전세계(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유럽) 20세기의 거장들이 지은 집을 (제목 그대로) 7년간 순례하고 독자에게 그 집들을 소개한다. 내가 아는 건축가는 아무도 없긴 하지만 건축학도의 입장에서는 성지순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세계 문화유산 답사기 주택편'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건축 여행기라는 점에서 이전에 읽었던 '세계건축기행'과 비슷한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그 책에 비해서는 좀 더 감성적이고 쉽게 다가온다. 문체의 영향도 있지만 여행을 떠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의 설레임과 기대감,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사진이 아닌 직접 건축물을 보고 느낄 때의 놀라움과 감동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두 책의 가장 큰 차이는 소재이다. 세계건축기행이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세계문화유산들이 소재라면, 이 책은 20세기의 주택만이 소재이다.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저자의 감성을 드러내는 문체만이 아니다. 저자가 직접 찍은 주택들의 내외부 사진과 스케치한 설계도가 책에 생생함을 더해준다. 저자가 단순한 건축가가 아닌 주택 건축의 팬이기 때문에 집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것 같다. 또한 책 중간중간 등장하는 일러스트들(표지의 일러스트를 포함해서) 또한 저자가 직접 그린 것들이다. 

8명의 건축가의 9개의 주택이 소개되는데 거장 건축가들의 작품임에도 화려하거나 전위적이기만 하고 비실용적인 면이 그다지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은 약간 예외이긴 하지만 낙수장이 백만장자의 별장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르 코르뷔지에의 어머니의 집이나 루이스 칸의 에시에릭 하우스가 마음에 든다. 주변 경관과 잘 조화가 되고, 과하기는 커녕 오히려 단순한 구조, 눈치채지 못할 곳에서도 집에 살 사람들을 세심히 배려한 흔적들. 여러가지 요소가 '나도 이런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사실 주변과 집의 조화와 그 집에 살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소개된 여러 주택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이다. 작은 채광창 하나, 가구 배치 하나, 진입로 각도, 편안한 동선 배치까지,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알게 되면 건축가의 세심함에 놀라게 된다.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그들을 거장이 되도록 한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저자는 평범한 독자들이라면 놓치기 쉬운 하나하나를 발견하고 설명해준다. 

세상에는 수많은 집들이 있지만 저자가 고르고 골라서 책에 소개된 집들에서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주위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집들을 보여준다. 로마의 콜로세움이나 무굴의 타지마할,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이 거대하고 웅장하지만 사람이 사는 공간은 아닌 건축물과는 달리 평범한 사람들이 요리하고 식사하고 잠드는, 생명이 살아가는 집들을 볼 수 있다. 더불어 저자의 주택에 대한 애정 또한 엿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주택 건축에 관심이 있다면 강추.
자신이 살 집을 짓고 싶은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 강추. 
아파트만이 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추천.
조금은 다른 여행기를 원한다면 추천. 


<본 리뷰는 그여자 Gene으로부터 지원받은 책을 이용해 작성되었습니다>
by 청춘한삼 2012. 10. 28.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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