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하면 어린 시절 한번씩 읽어보다 길고 복잡한 이름에 지쳐 결국 책을 던지고 마는..혹은 덮어버리게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싶다. (나만 그런가) 물론 몇년전에는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신화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제우스나 포세이돈, 헤라클레스, 오디세이와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그리스 신화 속의 개별 이야기들은 이전에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즐기는 이야기이다. 최근에는 영화들도 나오고 있고.

하지만 그리스 신화를 다루는 많은 책들에 아쉬운 점은 책을 읽는 대상을 어린이, 청소년으로 한정지은 듯한 구성을 보이거나 그저 옛날 이야기 정도로만 다루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오래된 이야기, 고전, 은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독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를 과거에만 한정시켜서 오래된 판타지 소설로 치부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리스인 이야기 / 신화가 된 영웅들의 모험과 변신 그리고 사랑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구본형 (생각정원,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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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차고 넘치는 자기계발서의 1세대라 불리는 구본형 선생이 생전에 출판한 '그리스인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를 과거에만 묶어놓지 않기 위한 노력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를 변형시켜 현재에 억지로 끼워맞추지는 않는다. 대신 신과 더불어 살아가던 그리스인들을 통해 현재 우리 삶을 비춰보고 현재 우리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신들에 의해 먹을 것을 먹지 못하게 된 탄탈로스와 언제까지나 산 정상을 향해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를 통해 현재의 우리 모습, 혹은 지금까지 반복되온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조심하라, 신은 영리한 인간을 좋아하지 않아.
경솔하구나, 신인 듯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자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신들도 불경은 기필코 응징하나니
물리 출렁거려도 마실 수 없고 과일이 주렁거려도 딸 수 없으리.
가장 많이 가진 것 때문에 괴로워하게 되리니, 신의 것을 훔치지 마라.

날마다 같은 일을 땀 흘려 반복하는 것은
아직도 직장인들이 매일 하는 바로 그 일.
수없이 기를 써 올리지만 수없이 다시 굴러떨어지는 저놈의 바위.
언제는 일이 그친 것을 보았느냐.
세월이 얼굴에 깊은 고랑을 파고, 무의미를 반복하다 쓰러지는 구나, 우리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모험 정신일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운명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만큼 고대 그리스인들이 운명에 대해 두려움과 함께 경이감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운명에 대항해 모험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영웅으로 칭송했다. 하지만 현대에 자신이 모험을 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조 영웅 페르세우스나 누구나 알고 있는 헤라클레스, 트로이 전쟁에 나선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보다보면 내 인생은 그런 영웅들의 삶만큼 화려하거나 스펙타클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괴물들을 잡고 전쟁터에 나가야만 모험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우리가 점령해야 할 세계이고 운명이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나 자신도 필요하다면 혁명을 통해 운명을 바꾸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은 운명에 대항한 모험에서 우리가 판판히 깨질 수도 있고 더 큰 실패를 할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운명을 바꿀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운명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들을 남겨두었다. 오이디푸스는 그 중에서도 불운 of 불운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자녀까지 낳는 운명을 따랐던 오이디푸스는 불행이라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불행의 가속페달을 밟았지만 끝끝내 운명은 그를 거두어 주었다. '운명에 굴복하라'가 아닌 '운명을 사랑하라'. 이것이 저자가 그리스인 이야기를 정리한 하나의 계기가 아니었을까.

오이디푸스는 미약한 존재로서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우주가 전하는 부름을 받고 가장 불운한 삶의 길을 견뎌갔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거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이 불행에 협력하여,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고국에서 추방함으로써 그 불행을 정점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불행의 절대적 의미를 완성했던 것이다. 더 이상 그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게 되자 그를 그렇게 몰아세웠던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그 너머로 들어선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신을 느끼게 되면서 비로소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체는 아테네와 그리스 전체를 수호하는 성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이제 한 인간이 기나긴 고난을 지나온 후 자신의 지독한 운명을 용서하고 화해하게 되었다.


참고로 앙드레 보나르가 쓴 '그리스인 이야기'도 있으니 제목만 보고 착각하지 않으시길.
by 청춘한삼 2014. 5. 17. 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