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한일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르자 여러 나라에서 승부조작 의혹을 제기하고 일부 국가에서는 승부조작을 기정사실화 하며 한국축구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폄하하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당연히 우리 국민들은 분노했었고 지금도 잊을만하면 한번씩 터져나오는 쓸데없는 주장들에 한번씩 화를 내곤 한다.

당연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승부조작'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은 매우 좋지 않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축구나 월드컵과 승부조작이라는 단어를 함께 연상하는 것이 비현실적이고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4강 진출을 승부조작과 연계했던 나라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기억을 잘 떠올려 보거나, 지금 열려있는 인터넷 브라우저 창을 닫기 전에 구글링을 통해 당시 어떤 나라들이 승부조작을 의심하고 의혹을 제기했는지 확인해보라. 그들 대부분은 자국의 축구가 승부조작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축구'와 '승부조작'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잘 엮여있는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한국 대표팀의 경기력을 인정하기보다는 기대하지 않았던 팀들이 성과를 내는데 익숙한 방식인 승부조작을 떠올렸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승부조작 청정지역만은 아니다. K리그의 승부조작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 많은 선수들이 징계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고 타 스포츠 종목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목에서는 심지어 감독까지 사법처리되기도 했다.  그 중 축구만 보더라도 월드컵 기간이 아닌, 평소에도 축구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동남아시아건 유럽이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승부조작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승부조작 사건의 기사들을 살펴보면 실체를 파헤친 심층취재는 찾아보기 힘들고 수사기관의 브리핑 복사-붙이기 혹은 추측만 난무하곤 한다. 그만큼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승부조작이고 개인보다는 조직에 의해 행해지기 때문에 취재를 하는 것이 어려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일을 해낸 기자가 불편한 진실을 담을 책을 펴냈다.

승부조작의 진실 / 조작된 승부와 베팅의 세계 그리고 월드컵의 불편한 진실
카테고리 취미/실용/스포츠 > 스포츠
지은이 데클란 힐 (다람,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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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The Fix: Soccer and Organized Crime(승부조작: 축구와 조직범죄)',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승부조작'이 아닌 '승부조작의 진실'로 제목이 정해졌다. 저자인 데클란 힐은 탐사보도 전문 기자로 세계 각국의 승부 조작꾼, 도박 조직, 축구 선수를 포함한 관계자들을 만나 취재를 했다. 승부조작이 행해지는 이유는 단 하나, 돈이다. 불법 토토, 불법 도박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승부조작은 부도덕한 개인이 하기는 힘들다. 그 때문에 배후에는 항상 큰 조직이 있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이 분야의 취재는 매우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저자 또한 위험한 상황을 헤쳐왔고 최소한의 안위를 위한 조치를 취했고,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하자면, 독자들도 이 책의 조사 과정이 매우 위험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특정인의 이름과 날짜를 비롯한 일부 정보를 비공개로 처리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나는 모든 조사 자료를 두 나라에 있는 두 명의 변호사에게 따로 맡겼다. 변호사들에게는 혹시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모든 자료를 공개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해 이 같은 조처를 했다. 독자 여러분이 모든 조사 자료를 볼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이 책에서 밝힌 내용만으로도, 축구계를 거듭나게 하는데 충분하기를 바란다.

축구는 야구같은 타스포츠에 비해 기록으로 정리되는 것이 많지 않다. 스코어와 승리/패배팀, 득점자, 좀 더 범위를 늘려도 도움 정도가 대표적인 축구 기록이다. 하지만 아시아의 불법 도박 조직에서 취급하는 항목들은 훨씬 다양하다. 승리팀, 점수 차, 첫 골/마지막 골 득점자, 첫 골 득점 시간대, 경기 전체 골/헤딩 골 수, 오프사이드 개수 등등이 있다. 저자에 따르면 가장 인기있는 상품은 '아시안 핸디캡'이라고 불리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강팀이 미리 지정된 점수 차 이상으로 이기면 돈을 딸 수 있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A팀 2골차 승리에 돈을 걸었다면 A팀이 2:0이나 3:0, 4:1로 이기면 돈을 딸 수 있지만 비기거나 1:0으로 이기면 돈을 잃는 것이다. 아시안 핸디캡이 인기라는 의미는 '승부조작'이라는 단어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강팀이 어이없이 패배하면서 엄청난 배당률을 독식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저 강팀이 적당한 스코어로 '확실히' 이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팀에게 다음 경기를 지라고 돈을 줄 필요가 없이 어차피 질 것 같은 팀이 '확실히' 지도록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승부 조작꾼들이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승리팀과 점수차를 알려준 경험들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승부 조작꾼들은 아시안 핸디캡만 이용하는 것은 아니라 '점수 맞추기'와 '전체 골 개수 맞추기'도 이용한다. 배당률을 높여 한번에 큰 돈을 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가장 흥미로왔던 사례는 말레이시아 사라와주(州)와 싱가포르 올림픽팀(U-23)의 경기였다. 2006년 4월 12일, 두 팀의 FA컵 8강 경기전, 갑자기 베팅 업체에 전체 골 개수 맞추기 베팅에 많은 돈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 돈들은 일반적으로 많이 나오는 스코어에 기초한 2, 3골에 몰리는 것이 아니라 '9골 이상'에 몰려들었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배당률 덕에 '9골 이상' 항목은 처음 30배 이상에서 경기 시작 직전에는 2.5배까지 떨어졌다. 그 결과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 선수의 증언을 따르자면, 이 소식을 들은 구단 관계자들이 선수 대기실로 쳐들어가서 승부 조작을 단념할 것을 명령했다. 모든 선수는 승부 조작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최선을 다해서 뛰겠다고 구단 관계자에게 약속했다.
경기 결과는? 무너진 배당률이 예고한 대로였다. 싱가포르 올림픽 팀이 7-2로 이겨 총 9골이 나왔다. 싱가포르 풀스(주: 싱가포르 공식(국립) 베팅업체)는 수십만 달러의 손실을 보았다. 해당 경기는 승부 조작이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승부 조작 계획이 누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누설된 정보는 수많은 노름꾼의 무차별적인 '묻지 마 베팅'을 촉발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시아 축구의 신뢰도는 다시 한 번 땅에 떨어졌다.

누군가는 동남아나 아시아에서처럼 수준이 낮은 일부 지역에서만 승부조작이 일어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다른 곳도 다르지 않다. 훨씬 이전부터 축구 리그가 존재했던 유럽도 유구한 승부조작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에 더해 아시아에서 흘러들어온 검은 돈과 승부 조작꾼들에 의해(저자는 메뚜기떼라고 표현한다) 승부조작이 벌어져왔다. 최근에도 승부조작 사실이 밝혀진 유럽 경기들이 380경기가 있었고 그 중에는 자국 리그만이 아니라 챔피언스리그, A매치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 이전에 밝혀진 이탈리아 세리아의 승부조작이나 독일 리그의 조작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수백 경기(한정된 기간 내에 밝혀진 경기만)를 조작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승부 조작꾼들은 그 대회를 가리지 않는다. 축구에서 가장 큰 대회라면 누가 뭐래도 월드컵일 것이다. 메뚜기떼들은 월드컵까지 먹어치울 수 있을까? 전 세계가 몇 년에 걸친 예선을 통과해 4년에 한번씩 밖에 참가하지 못하는 가장 권위있는 축구 대회 본선에서 승부조작이 일어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아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단순히 승부조작이 있다고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다. 본선 경기 전에 이미 승리팀과 점수차를 맞추는 승부 조작꾼을 만나기도 했고, 월드컵이 시작하기도 전에 우승팀을 알고 있었다는 조작꾼을 만나기도 했다.

저자가 월드컵 본선에서 벌어진 승부조작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된 취재는, 그야말로 탐사 저널리즘의 승리다. 승부 조작꾼들이 월드컵 본선 경기를 조작하는 회의를 직접 목격했다. 장소는 무려 방콕의 KFC였다. 그리고 해당 국가 언론인과 승부 조작꾼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뒤 직접 월드컵 대표팀이 머무는 호텔에 찾아가 취재를 했고, 조작이 이루어지기로 한 본선 경기를 직관했다. 두 골 차 이상으로 패배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경기들의 결과는 모두 적중했다. 월드컵 이후 해당 국가까지 무작정 찾아간 저자에게 해당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월드컵을 포함해 다른 대회들에서도 조작꾼들의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고 돈을 받은 일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승부조작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100% 조작이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 팀이 어떤 팀인지, 어떤 경기인지는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 참고로 그 팀은 이번 월드컵 본선에도 출전 중이다.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2008년이었다. 이 후 6년이 흐르는 동안 또 한번의  월드컵, 유로, 올림픽, 챔피언스리그, 각 나라 리그와 컵대회들을 비롯한 수많은 축구 경기가 치뤄졌고, 지금도 월드컵이 치뤄지고 있다. 그 동안 축구계가 얼마나 더 깨끗해졌는지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축구계를 좀먹는 승부조작 문제를 해결하거나, 최소한 해결하려는 의지를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면 결국 승부조작이라는 암은 축구라는 숙주를 죽이고 다른 숙주를 찾을 것이다. '승부조작의 진실'의 가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축구가 죽기 전에 승부조작이라는 암을 치료해야만 한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가치도 있다. 책을 읽고 나면 지금까지와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스포츠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덧. 아래는 원서 표지인데 번역본보다 훨씬 더 책 내용에 맞는듯한데 왜 바꾼건지..

by 청춘한삼 2014. 6. 21. 20:00
그리스 신화를 통해 고대 그리스인과 신들에 대해 알아 봤으니 이제는 현대 그리스를 돌아본 여행기를. 뜬금없다 싶어서 꼭 지금 사봐야 할까..하는 생각에 구입을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제대로 읽게 된 박경철의 첫번째 여행기, 문명의 배꼽 그리스. 완결이 되면 볼까도 했지만 한두권 나오고 마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언제 완결이 될지도 까마득하다보니 결국은..

이전에 한번 저자에게 그리스 여행에 대해 직접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ppt까지 준비해와서 표지를 띄워놓았던 시골의사는 관객들 중에 학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며 즉석에서 주제를 바꾸어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부터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 어린 시절의 심리, 이를 통한 바람직한 교육에 대해 강연을 했었다. 어찌보면 그 때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것이 다행으로 생각된다. 여행기는 책을 통해 대강의 내용을 알 수 있지만 당시 들었던 저자의 경험은 그 기회가 아니면 들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배꼽, 그리스 (박경철그리스기행1)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박경철 (리더스북,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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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과 같은 전작들에서 보여준 인간적이면서도 맛깔나는 시골의사의 문체와 더불어 여타 여행기와의 차별성은 '니코스 카잔차키스'다. 책의 서문에서부터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이십대의 청년이 가슴에 새긴 꿈을 나이 오십을 앞두고 실현한 긴 여행의 기록'이다. 이십대의 청년의 가슴에 꿈을 새기게 만든 인물이 바로 니코스 카찬차키스였다. 서문을 통해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의과대학을 다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이란 무엇인지, 육신을 넘어 영혼에까지 생기를 불어넣는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아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가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조화를 이루며 쌓아 올린 문명과 역사의 참모습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새 인류가 오랜 역사를 통해 스스로에게 던진 그 오래된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이 어떠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온갖 책들을 전전하며 가슴앓이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단골 책방의 서가를 둘러보던 그 청년은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라는 책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이름도 낯선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 그리스 작가의 책을 산 청년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단숨에 읽어버립니다. 작은 불씨가 큰 산을 태우듯, 책을 읽어가면서 그의 가슴에는 점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불이 일었습니다. 마침내 그 뜨거운 불길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혼자 떠나 혼자 떠도는 여행이었지만 저자는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 항상 그의 옆에는 카잔차키스가 함께하며 때로는 조언을, 때로는 설명을. 카잔차키스는 옆에 있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친구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카잔차키스의 무덤에서 제를 올리던 저자에게 관심을 보이던 택시기사는 카잔차키스가 그의 영웅이라는 저자의 말에 자신의 친구인 카잔차키스의 또다른 친구과 아낌없이 우정을 쌓는다.

그리스인들에게 우정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같이 사랑하고, 내가 살아가는 곳에 같이 살아가고, 내가 아끼는 것을 같이 아끼는 사람. 그것이 친구이고, 친구에게는 모든 선의를 베풀어야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인들의 명예의 한 축을 담당하는 '우정'이란 말의 의미다. 이 우정은 곧 명예고, 거기에 용맹을 더하면 탁월함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명예를 누구보다 드높인 사람들, 그들은 '영웅'이라 부른다.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나라, 다른 사회를 접하게 되면 어느 것 하나 정도는 부럽다는 감정을 가지곤 하게 된다. (물론 예외는 있다) 저자의 경험을 통해 느낀 그리스에 대해 부러운 것은 바로 이런 점이다. 처음보는 타인과 공감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을 믿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얼마전 우리나라의 사적 신뢰지수가 OECD에서 최하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은 타인을 신뢰하십니까' 이런 문항에 대한 답을 통해 신뢰도를 조사하는건데 신뢰한다는 응답이 10명 중 3명이 안됐던걸로 기억한다. (정부 공적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말할 것도 없다) 분명 그리스도 경제 문제도 있고 하니 최하위권일텐데. 입장을 바꿔서 우리도 그리스인 택시기사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행동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아마 말조차 걸지 않거나 공공장소에서 이상한 행동을 한다며 신고를 하지 않아도 다행은 아닐까.

글 이 옆으로 조금 새기는 했지만 박경철이 경험한 그리스도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경제 상황 때문에 불법체류 중인 외국인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태도를 가진 극우파들도 흔히 볼 수 있는 듯 하고, 과거에 영광을 누렸던 도시들이 유적조차 제대로 관리되거나 남아있지 못한 것을 보면 한탄이 나오기도 한다.

크레타 섬에서 카잔차키스를 매개로 나누었던 우정을 제외하면 아직은 코린토스나 스파르타 같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만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몇 개 도시와 유적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스에 대한 많은 것을 보여준다. 나도 저자처럼 가슴에 그리스와 카잔차키스, 시골의사를 품고 함께 다음 여행지로 떠나길 기다려본다. 신들이 잠들어 있는 그곳으로.
by 청춘한삼 2014. 6. 6. 20:30
그리스 신화!!하면 어린 시절 한번씩 읽어보다 길고 복잡한 이름에 지쳐 결국 책을 던지고 마는..혹은 덮어버리게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싶다. (나만 그런가) 물론 몇년전에는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신화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제우스나 포세이돈, 헤라클레스, 오디세이와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그리스 신화 속의 개별 이야기들은 이전에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즐기는 이야기이다. 최근에는 영화들도 나오고 있고.

하지만 그리스 신화를 다루는 많은 책들에 아쉬운 점은 책을 읽는 대상을 어린이, 청소년으로 한정지은 듯한 구성을 보이거나 그저 옛날 이야기 정도로만 다루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오래된 이야기, 고전, 은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독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를 과거에만 한정시켜서 오래된 판타지 소설로 치부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리스인 이야기 / 신화가 된 영웅들의 모험과 변신 그리고 사랑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구본형 (생각정원,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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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차고 넘치는 자기계발서의 1세대라 불리는 구본형 선생이 생전에 출판한 '그리스인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를 과거에만 묶어놓지 않기 위한 노력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를 변형시켜 현재에 억지로 끼워맞추지는 않는다. 대신 신과 더불어 살아가던 그리스인들을 통해 현재 우리 삶을 비춰보고 현재 우리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신들에 의해 먹을 것을 먹지 못하게 된 탄탈로스와 언제까지나 산 정상을 향해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를 통해 현재의 우리 모습, 혹은 지금까지 반복되온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조심하라, 신은 영리한 인간을 좋아하지 않아.
경솔하구나, 신인 듯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자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신들도 불경은 기필코 응징하나니
물리 출렁거려도 마실 수 없고 과일이 주렁거려도 딸 수 없으리.
가장 많이 가진 것 때문에 괴로워하게 되리니, 신의 것을 훔치지 마라.

날마다 같은 일을 땀 흘려 반복하는 것은
아직도 직장인들이 매일 하는 바로 그 일.
수없이 기를 써 올리지만 수없이 다시 굴러떨어지는 저놈의 바위.
언제는 일이 그친 것을 보았느냐.
세월이 얼굴에 깊은 고랑을 파고, 무의미를 반복하다 쓰러지는 구나, 우리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모험 정신일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운명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만큼 고대 그리스인들이 운명에 대해 두려움과 함께 경이감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운명에 대항해 모험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영웅으로 칭송했다. 하지만 현대에 자신이 모험을 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조 영웅 페르세우스나 누구나 알고 있는 헤라클레스, 트로이 전쟁에 나선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보다보면 내 인생은 그런 영웅들의 삶만큼 화려하거나 스펙타클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괴물들을 잡고 전쟁터에 나가야만 모험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우리가 점령해야 할 세계이고 운명이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나 자신도 필요하다면 혁명을 통해 운명을 바꾸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은 운명에 대항한 모험에서 우리가 판판히 깨질 수도 있고 더 큰 실패를 할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운명을 바꿀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운명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들을 남겨두었다. 오이디푸스는 그 중에서도 불운 of 불운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자녀까지 낳는 운명을 따랐던 오이디푸스는 불행이라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불행의 가속페달을 밟았지만 끝끝내 운명은 그를 거두어 주었다. '운명에 굴복하라'가 아닌 '운명을 사랑하라'. 이것이 저자가 그리스인 이야기를 정리한 하나의 계기가 아니었을까.

오이디푸스는 미약한 존재로서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우주가 전하는 부름을 받고 가장 불운한 삶의 길을 견뎌갔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거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이 불행에 협력하여,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고국에서 추방함으로써 그 불행을 정점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불행의 절대적 의미를 완성했던 것이다. 더 이상 그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게 되자 그를 그렇게 몰아세웠던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그 너머로 들어선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신을 느끼게 되면서 비로소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체는 아테네와 그리스 전체를 수호하는 성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이제 한 인간이 기나긴 고난을 지나온 후 자신의 지독한 운명을 용서하고 화해하게 되었다.


참고로 앙드레 보나르가 쓴 '그리스인 이야기'도 있으니 제목만 보고 착각하지 않으시길.
by 청춘한삼 2014. 5. 17. 17:30
관련글: 
 [그남자와 책] - 실마릴리온 - J.R.R. 톨킨

톨킨의 또 하나의 중간계 이야기, 후린의 아이들.
실마릴리온에서 나왔던 후린과 그의 가족들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목은 '아이들'이지만 거의 대부분은 아들 투린에 대한 이야기이다. 투린이라는 이름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도 잠시 언급되었다고 하지만 나도 기억이 안나고 아마 대부분 그냥 대사겠거니..라고 지나갔을 듯 하다. 나중에 영화를 다시 보면 찾아봐야겠다. 

후린의 아이들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J. R. R. 돌킨 (씨앗을뿌리는사람,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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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인간이기는 하지만 고귀한 혈통이자 영웅 후린의 아들로 태어나 절대악 모르고스(멜코르)의 저주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투린의 출생부터 마지막까지를 다루고 있는 일대기이다. 아버지만큼이나 뛰어난 영웅이었지만 기구하고 슬픈 운명을 등에 업고 살아가야 했던 투린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유한한 생명과 능력의 인간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운명, 혹은 숙명이라는 존재를 의식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흘러가는 인생의 방향이 운명이라는 네비에 의해 이끌리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투린의 극적인 삶에 빠져들고 공감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된다. 

운명과 비극을 섞여놓은 영웅이라고 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오이디푸스를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그나마 후린의 아이들, 투린과 니에노르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만큼 막장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사실 막장스러운 비극적 운명은 우리나라 드라마 인물들 하나하나가 후린과 모르웬, 투린, 니에노르를 다 합친 것보다 더 심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연속 개봉 중인 영화 '호빗'의 마지막 편에서 드래곤 슬래이어가 탄생하겠지만 6000년도 더 전에 최초의 드래곤 슬래이어였던 투린의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삶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면 추천
호빗과 반지의 제왕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추천
성격 나쁜 영웅 이야기를 싫어한다면 비추
by 청춘한삼 2014. 3. 30. 21:46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에서는 미디어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이 몇 번이나 제기되었다. 방송사로 투하되는 낙하산 인사라든가 한 사건을 두고도 전혀 다른 시각(경우에 따라선 팩트까지)을 보여주며 대립하는 방송과 신문들, 팩트를 전달하는 기사인지 논조를 가지는 사설인지를 알 수 없는 기사들, 정치적 편향성 논란, 지나친 상업성까지. 이전에는 표면 밑에서 (비교적) 조용히 벌어지던 문제들이 이제는 밖으로 뛰쳐나와 나같은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알려지고 있다. 

미디어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언제나 공정하고 균형잡힌 시각에서 사실만을 전달하기를 바랬던 미디어가 이제는(혹은 원래부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디어 씹어먹기' 뒷표지의 '미디어는 왜 거짓말을 할까?'라는 크고 빨간 글씨는 흥미를 끌게 하기에 충분했다. 
 

미디어 씹어먹기 - The influencing machine
카테고리 정치/사회 > 언론/신문/방송
지은이 브룩 글래드스톤 (돋을새김도,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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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씹어먹기' 뒷표지의 글을 조금 인용해보면, 

미디어가 의심받고 있다. 뉴스 소비자들은 더 이상 미디어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미디어가 정치와 자본, 이념과 진영에 종속되었으며 이제 대중이 아닌 그 배후에서 조종하는 어떤 세력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믿는다. 미디어는 왜 편파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을까? 앞으로는 어떻게 진화하게 될까?


앞에서 언급했던 우리나라에서 불거지는 미디어에 대한 문제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 아닌가 싶다. 이 글만 보면 우리나라 저자에 의해 나온 책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이 책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브룩 글래드스톤에 의해 쓰여졌다. 아니 만화로 된 책이기 때문에 글은 글래드스톤에 의해, 그림은 조시 뉴펠드에 의해 그려졌다고 해야겠다. 물론 저 글은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썼겠지. 

책의 원제는 'The influencing machine'이다. 직역하자면 '영향을 주는 기계' 정도로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흔히 미디어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조종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미디어에 대한 책의 제목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미디어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은 망상일 뿐이고 실제로 미디어는 우리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거울은 강렬하고 퇴폐적이며 지루하고 또 초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흐리멍텅하고 군데군데 금이가고 깨져있는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을 보기 때문에 혼란이 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안의 풍경 중 일부는 분명 우리의 모습이 들어있고 일그러진 거울 속 풍경을 제대로 인지하려면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쉽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모순되거나 혼란스러운 보도를 접했을 때 원본 문서를 읽어보거나 미심쩍인 정보원에 대해 알아보거나,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다른 견해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책에도 나와있지만 제퍼슨이 말한 것과 같이 '자유는 끊임없는 경계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미디어에 대한 논란 중 하나는 미디어의 '객관성(입장)'일 것이다. 미디어는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미디어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 논쟁을 해왔거나 할 예정일 것이다. 객관성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객관성에 대한 집착은 양비론이나 실제로는 전혀 균형잡히지 않은 균형보도로 이어지곤 한다. 저자는 '역사상 가장 예리한 보도들은 자기 주장이 센 기자들의 작품이었다'고 말한다. 예로 드는 것이 '스탠더드 오일 회사의 역사(아이다 타벨)', '노조간부제 기업의 새로운 도구(레이 스태너드 베이커)', '뉴욕(링컨 스테펀스)'인데 나로서는 모두 처음 듣는 기사들이다. 그리고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로 링크되어 있는 시대의 새로운 형식의 미디어에서 저널리스트가 독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신의 견해와 가치관, 일의 처리 과정 그리고 가능하다면 정보원에 대해 명백히 밝히는 것밖에 없습니다. 
미디어 비평가 데이비드 와인버거는 웹의 영향력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예측했습니다. 
'투명성이 새로운 객관성이 된 거죠. 투명성은 독자들이 기존의 편견들로 인해 예상치 못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주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객관성이 그랬던 것처럼, 투명성은 신빙성을 제공합니다. 투명성이 없는 객관성은 점점 더 오만함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증거와 견해들 그리고 토론을 위해 웹을 활용할 수 있는데, 누군가가 선의의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우리가 왜 신뢰해야만 하는 걸까요? 객관성은 매체끼리 링크될 수 없던 시절에 의존하던 신뢰구조입니다. 이제 우리의 매체는 서로 링크될 수 있죠.' (...)
<타임>지의 제임스 포니워직은, 정치부 기자는 지지하는 사람을 명백히 밝힌 후 탁월한 저널리즘의 실천을 통해 편향성에 대한 공격을 반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성의 시대에 허위는 훨씬 더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마치 공평무사한 대리석 신들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이제 근엄한 신전을 벗어나 책임감 있는 시민들처럼 우리도 선거에 관심이 있다고 인정해야 할 때이다. 그 후 책임감 있는 전문가들처럼 진실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미디어(혹은 개별 언론인)의 입장을 밝히고 그에 대한 기사를 쓰거나 보도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견해를 토대로 상대편을 헐뜯거나 비난하기만 하거나 우리편 뒤를 닦아주라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뒤를 잘 닦아주는 능력을 보여주어서 '대변인' 자리를 GRAP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 제대로 된 언론인이라면 포니워직이 말했듯 '탁월한 저널리즘의 실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마음대로 발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디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용자(뉴스 소비자)가 제대로 된 정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국가는 국민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진다는 말이 미디어에도 그대로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실을 파헤쳐서 양질의 기사를 쓰고 보도를 한다고 해도 아무도 읽거나 보거나 듣지 않고 대신 마이크 하나만 가지고 헐벗고 춤추는 아이들에 대한 정보에만 관심이 있다면 미디어와 언론인이 어느 쪽에 더 집중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뉴스 소비자의 노력이다. 현대 사회의 인간은 아직 여러모로 현대 사회에 맞게 완전히 진화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편견이나 무의식을 비롯한 비이성적인 면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미디어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 모습은 우리가 개별적인 자신에게 느끼는 것에 비해 훨씬 원초적인 모습을 많이 보일 수 있다. 개별 자신과 대중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결국 개개인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미디어를 소비할 때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으로 미디어를 만들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저널리스트 로버트 라이트는 '인류는 일종의 시험을 앞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지만 내 생각엔 인류는 언제나 시험을 치고 있었다. 결과는 바로바로 나오지만 그 결과를 주의깊게 다시 들여다보고 오답노트를 작성하는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였을 뿐이다. 그리고 어제의 시험보다 오늘의 시험이 더 중요하지는 않고 마찬가지로 오늘보다 내일의 시험이 더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좋은 결과를 내도록 노력하고 역주행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내용과 내 의견이 범벅이 되어버려서 슬슬 마무리 하자면, 
이 글에서는 미디어의 객관성과 뉴스 소비자에 대한 내용만 언급했지만 책에는 미디어의 역사를 비롯해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있다. 특히 국가와 미디어 간의 역사와 관계에 대한 내용은 읽어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 외에도 다른 만화책을 소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형식이 만화이기 때문에 내용이 덜 딱딱하다고 생각된다. 그림 대신 글자로만 그 분량을 채웠다면 아마 훨씬 재미없었을지도 모른다. 

평소 혹은 어떤 논란이 있을 때, 언론과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져본 적 있다면 강추. 


덧. 뉴스 산업에 대한 비판에도 관심있다면 이 책을 추천.
  [그남자와 책] - 웰컴 투 뉴스 비즈니스 

덧2. 뉴스 소비를 비판적으로 하는 방법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들을 추천.
  [그남자와 책] -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그남자와 책] -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by 청춘한삼 2014. 3. 16. 19:39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 이후 '호빗'도 3부작 영화로 제작되어 차례로 개봉되고 있지만 '반지의 제왕'만큼의 호응은 얻지 못하는 듯 하다. '반지의 제왕'이 처음 개봉되었을 당시 처음 느껴졌던 방대한 스토리와 웅장하고 엄청난 시각적 효과는 소설을 읽을 때의 느낌 그 이상이었다. 영화 '호빗'이 완결되고 나면 이제 톨킨 작품의 영화화는 끝나는 것일까? 이제 남은 것은 '실마릴리온'과 '후린의 아이들' 정도인데 이들의 영화화가 더 쉬울지는 의문이다. 빌보와 절대반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호빗'과 달리 '반지의 제왕'과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적기 때문이다. 없는 것이 아니라 적은 이유는 모든 작품의 스토리가 연관되어 있기는 하기 때문. 그 중 모든 작품의 뿌리와 줄기 역할을 하는 작품이 실마릴리온이다.

실마릴리온.1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J. R. R. 돌킨 (씨앗을뿌리는사람,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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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마릴리온.2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J. R. R. 돌킨 (씨앗을뿌리는사람,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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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장르를 집대성한 톨킨의 노력 중 일부이지만 가장 대중적인 작품인 '반지의 제왕'은 중간계에서 절대반지로 인해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을 따라가며 보여준다. '반지의 제왕'에서도 절대반지의 탄생이라든가 이후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언급되기는 하지만 비어있는 내용이 너무나 많다. 이야기의 배경인 중간계는 어떤 곳인지, 사우론은 누구인지, 간달프는 어떻게 빌보가 젊을 때부터 늙어서 은퇴하고 반지를 프로도에게 넘길 떄까지 정정하게 돌아다니는지, 인간들의 두 나라(곤도르, 로한)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엘프와 드워프는 왜 사이가 나쁜지, '반지의 제왕' 마지막에 프로도가 배를 타고 떠나는 곳은 어디인지 등등 판타지 세계라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던 점들을 따져들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이미 톨킨에 의해 만들어져있다. 아니, 질문이 먼저 나오고 대답을 한 것이 아니라 톨킨이 창조된 중간계의 거의 모든 역사가 톨킨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 중간계의 탄생, 신화, 기후, 지형, 종족들의 탄생, 역사적 사건들, 심지어 언어까지, 모든 것은 톨킨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톨킨이 만들어 낸 세계가 이후 판타지 소설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 톨킨은 판타지의 아버지라는 호칭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실마릴리온은 '실마릴'이라는 보석에 대한 이야기이자 중간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태초에 유일자 '일루바타르'는 '거룩한 자', 즉 '아이누'(발라)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중간계)를 창조한 뒤 일부 아이누들을 중간계로 내려보냈다. 중간계로 내려온 아이누들은 일루바타르의 첫째와 둘째 자손인 엘프와 인간이 중간계에 태어나기 전에 하늘과 땅, 바다 등 모든 것을 창조하고 관리하여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아이누 중 가장 힘이 강한 멜코브(모르고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동료들과 결별하고 악을 중간계에 퍼트리기 시작했다. 
엘프 종족의 탄생 이후 페아노르라는 한 엘프가 실마릴이라는 보석을 만들어 내었다. 물론 멜코브는 태초의 빛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보석을 탐내었고 음모를 통해 결국 실마릴을 차지한다. 페아노르는 모르고스로부터 실마릴을 다시 찾기 위해 광기어린 맹세를 하고 페아노르의 자식들도 이에 동참하고 오랜 세월 동안 실마릴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실마릴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책을 보면 알 수 있으니 관심 있으면 직접 읽어보시라.
 
실마릴리온에서는 실마릴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톨킨이 만들어 낸 중간계의 역사를 담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나름 큰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지만 실마릴리온은 그보다 훨씬 전, 중간계의 태초를 다루고 있다. 이 때문에 '반지의 제왕'에서 암흑의 군주로 나왔던 사우론은 세상의 검은 적, 모르고스, 의 부장에 불과하고 발라들의 시종이자 조력자인 마이아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간달프와 사루만 같은 마이아들의 비중은 거의 없다.

역사이자 신화적 성격을 띄기 때문에 유머러스하거나 읽기에 편하지만은 않은 딱딱한 문체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의 이야기를 담다보니 등장인물도 많아 누가 누구인지, 누가 어느 종족의 어느 혈족인지 등을 기억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나는 전자책으로 읽다보니 아무 것도 모르고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누구인지 적어가며 읽었지만 2권까지 다 읽고 나니 마지막에 가계도와 지도 같은 것들이 다 정리되어 있더라. 그게 헷갈려서 읽는 것을 세 번이나 포기했었건만. 종이책이었으면 어떻게든 넘겨보거나 훑어보면서 발견했을텐데..

어쨌거나 전호번호부를 읽는 듯한 등장인물들의 압박과 무미건조한 문체를 참아낼 수 있다면 판타지 소설의 뿌리를 읽어보는 경험도 나쁘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반지의 제왕을 재미있게 읽었고 중간계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원한다면 추천한다. 하지만 정통(톨킨계) 판타지 소설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데 그런 분류의 소설을 읽고 싶다면 개인적으로는 호빗에서 출발하기를 추천한다. 반지의 제왕을 먼저 읽고 싶다면 영화를 먼저 독파하는 것을 추천하고. 아마 그런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이 책으로 판타지 소설에 입문하려는 시도는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
by 청춘한삼 2014. 3. 2. 16:41
케네디라는 이름을 들으면 떠오랐던 이미지는 우선 암살, 다음은 69년 쏘아올린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그 다음에야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이 이미지들로부터 케네디는 젊고, 과학기술에 투자했으며 평화를 달성한 대통령으로서 공항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JFK) 유능하고 존경받는, 하지만 비운의 대통령이라는 느낌을 주는 역사 속 인물이었다. 당시 냉전 상황에 대해 전혀 이해가 안되있었기 때문에 이미지들 중 뒤의 두가지가 연결되있다는(물론 암살의 배후는 아직 알 수 없다) 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던 케네디의 기록물을 토대로 한 책이 나왔다. 기록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이 책은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기록물에 기초하여 쿠바의 미사일 기지가 발견되고 어느 정도 위기가 해소될 때까지 13일 간에 발생한 사건과 관련 회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존 F. 케네디의 13일 - 쿠바 미사일 위기, 거짓말, 그리고 녹음테이프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지은이 셀던 M. 스턴 (모던타임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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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세계사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면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 잘 알고 있을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나만 해도 쿠바에 미사일이 발견됐고 케네디가 해상 봉쇄를 비롯해 소련에 경고를 했고 소련이 그 것을 받아들여 무기를 실어나르던 배들의 목적지를 바꿈으로써 전쟁을 막았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이 정도이긴 하지만 이 두 줄 남짓의 서사 내부에서 벌어지던 긴박한 상황의 디테일을 파악하고 이해하기는 무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케네디가 직접 회의를 녹음한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당시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방대한 양의 녹음 테이프 내용을 정리하고 해설을 달아준 저자에 의해 이 책도 나올 수 있었다.

쿠바 미사일 사태는 1962년 10월 14일, U2 정찰기에 의해 쿠바에서 소련의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소련이 아닌 쿠바의 미사일 기지에서 핵미사일이 발사된다면 미국 본토는 시애틀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핵공격의 사정거리에 들어오게 되는, 미국에게는 그야 말로 목에 칼을 대고 살아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0월 16일부터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엑스콤) 회의가 대통령 주재로 계속해서 열리게 된다. 이 때의 엑스콤 회의들을 녹취한 내용을 바탕으로 핵무기를 이용한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한, 혹은 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쿠바의 미사일 위기는 어느 정도 미국이 자초한 결과이다. 미국은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직접적인 군사작전을 포함한 시도들을 해왔다. 쿠바나 소련 입장에서는 쿠바 침공 억지를 위해 미사일 배치를 생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닌 상황이었다. 미사일 기지가 발견되기 직전만 해도 쿠바 전복을 위한 몽구스 작전에 대한 회의가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기도 하다. 미사일 위기가 해소된 이후에도 쿠바 정권 전복 작전은 계속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평화의 전도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 내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대중에게 케네디는 매파였고 냉전 이데올로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 임기 동안 '완고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냉전의 전사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 미사일 위기가 당시 최강대국 간의 핵전쟁을 통해 지구적 종말을 불러오지 않은 이유는, 케네디 대통령의 타협적이고 비군사적인 외교적 노력 때문이었다. 군사적 행동을 주장하는 엑스콤 회의 참가자, 특히 군인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공멸이 아닌 공존을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은 어느 한 순간 머리 속에서 떠오른 발상이 아니다. 젊은 시절 해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느꼈던 전쟁의 참혹함에서 비롯된 전쟁에 대한 혐오증이 세월을 지나서 자신에 선택에 의해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막기 위한 노력으로 표출된 것이다. 비록 불완전한 인간이라 갈등하기도 하고 망설이기도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목적을 위해 주변을 설득하고 헤쳐나가는 모습을 통해 지도자가 갖춰야 할 리더십과 자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국가 최고 정책은 대통령의 가슴과 머리에서 나오거나, 적어도 대통령의 인격에 의해 담금질된다. 대통령의 확신과 열정은 가족과 학교와 젊은 시절의 경험에서 우러난 생각과 거의 항상 관련이 있다. p. 58

이 책의 단점이라면 곳곳에 지뢰처럼 숨어있는 오타다. 비단 역사를 다루는 책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타가 있으면 책의 완성도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역사책이라면 그점이 좀 더 아프게 다가온다. 이런 괜찮은 내용의 책을 내놓고 사소한 오타 때문에 아쉬움을 느끼게 하다니..교정은 어차피 돈주고 외부에 맡기는 걸로 알고 있는데 돈을 아껴보려고 너무 싼 곳에 맡겼거나 출판사 직원들이 직접 했다가 이렇게 됐나보다. 아래는 오타들의 몇 개 예시이다. 찾고도 귀찮아서 표시안해둔 것도 있다.

새로운 핵 시대의 새벽에 새로운 미국 국제주의의가 내세운 이상주의적 말들은 정치경제적 지배를 향한 미국의 욕구를 확실하게 숨겼다. p.38
케네가가 "어쩄든 저도 그렇다고 봅니다"라고 답한다. p.113
흐루쇼프로가 서반구에서 미사일 군비를 크게 확대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p.125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상황을 대입해 볼 수 밖에 없다. 전쟁의 가능성이 크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남아는 있고(가능성을 크게 보는 양극단의 돌+아이들도 있지만) 평화를 깨기 위한 방아쇠를 당길 기회는 최근 몇 년 간 꾸준히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결정적 상황이 벌어졌을 떄 우리나라의 소위 지도층에서도 평화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내막도 모른 채 전쟁의 포화 속으로 이끌려 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할까? 개인적으로는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다.

슈퍼 히어로 대신 현재의 지구가 존재할 수 있도록 노력한 사람과 사건에 대해 알고 싶다면 강추.
어떤 사람이나 사건의 뒷 이야기들에 흥미가 있다면 추천.
불완전한 인간이 주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쟁취하는 스토리를 좋아한다면 추천.

덧. 책을 소개하는 기사나 인터넷 서점들의 소개글을 보면 녹취 테이프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로 케네디가 1961년 피그스만 침공 실패 이후 말을 바꾼 자문위원들에게 화가 나서 이후부터 녹취를 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정작 책을 보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나와있다. 앞에 말한 이유일 수도 있지만 좀 더 가능성 있는 것은 퇴임 후 회고록 작성을 위함일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본인은 물론이고 녹음 장치를 설치한 사람들도 그 이유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든 기사나 소개글들이 하나같이 피그스만 침공 실패를 이유로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도 책의 내용을 읽어보지는 않은 듯 하다. 아마 출판사에서 좀 더 극적으로 보이는 첫번째 이유를 대면서 책 소개글을 기자와 서점들에 배포하고 이를 토대로 기사가 작성된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하지만 녹음 장치가 설치된 이유와 마찬가지로 진실은 알 수 없다.
by 청춘한삼 2014. 2. 26. 20:00
작년 가을 동안 드래곤 라자를 오랜만에 정주행했다. 처음 읽었던 때가 중2였으니 나이가 두 배가 되어서 읽은 건데 나이가 더 들어서인지, 어렴풋한 기억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던 기억의 틈새를 메워서인지, 아니면 처음 읽을 때 워낙 급하게 읽어서 제대로 뭔가를 느낄 시간 조차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 어떤 것이 주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판타지 소설은 아예 장르문학이라고 지칭되면서 주류(?) 혹은 일반 문학과 따로 분류되는데 드래곤 라자는 이야기의 배경이 판타지 세계라는 것 외에는 주제 의식이라든가 내용의 구성, 전개 능력처럼 더 중요한 것은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자 자국은 드래곤 라자가 나온지 1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해 나온 작품이다. 이 점만 가지고도 진작에 읽어보았어야 하는 작품인데 출간된지 5년이 넘어서 이제야 읽어보게 되었다. 혹시 출간된지 5년이 넘은 작품의 내용을 언급하는 것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래를 보지 말고 당장 창을 닫으시오. 

그림자 자국(양장)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이영도 (황금가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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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에서는 '드래곤 라자'의 이야기에서 천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10주년 기념으로 나온 소설이라 '드래곤 라자'의 팬들을 배려해서인지, 바이서스 제2의 건국의 시기에 활약했던 '드래곤 라자' 주인공들이 영웅으로 남을 수 밖에 없어서인지(아마 둘 다 겠지) 곳곳에서 '드래곤 라자' 출연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엘프인 이루릴은 이번 작품에서도 거의 주인공 급으로 출연하며 대부분의 드래곤보다도 나이가 많은, 최고령 엘프녀 배역을 소화한다. 또한 마법사 아프나이델은 이번 작품에서 핵심이 되는 소재를 제공함으로써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번 작품의 특징을 들자면, 이영도의 다른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면을 조금씩 '그림자 자국'에서 보여준다는 점이다.
우선 이야기의 핵심적인 인물인 예언자의 등장. '드래곤 라자'에서도 자이펀식 카드점을 보는 예언자(?)가 등장했을 때도 그랬지만 퓨처워커에서 나왔던 '미'와 주변 인물을 통해 드러냈던 예언의 위험성을 다시 한 번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람들은 예언자가 예언을 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자신이 바라던 예언이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래를 바꾸려 한다는 점을 통해 작품 내내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면서 작품을 이끌어 간다. 주인공들 외에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왕밖에 없지 않나 싶을 정도로. 정말로 이런 예언가가 있어서 모든 것을 알고 그것을 떠벌리고 다닐 때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해 가질 태도는 아마 다음 내용과 같을 것이다. 

왕비는 느긋하게 도착할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소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예언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여유 있게 보이려면 책이라도 한 권 붙잡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곤 가까운 곳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의자에 앉았습니다.그것은 고전 추리 소설이었습니다.
(...) 따라서 왕비는 탐정에 대한 살해 시도가 묘사되기 시작했을 때 완전히 수긍하며 몰입했습니다. 소년이 어떻게 당하게 될지 궁금해하던 왕비는 헛기침 소리를 들었어요.
(...) 예언자는 왕비를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옮겼습니다. 그의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은 책을 향했죠. 왕비가 의아하여 쳐다보았을 때 예언자가 책을 보며 말했습니다.
"범인은 영주의 아들입니다."
 (...) 왕비는 침소로 돌아가 책이나 마저 읽다가 자기로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책으로 손을 뻗던 왕비는 그 손을 멈췄습니다. 그녀는 당혹감을 느끼며 책표지를 노려보았지요. 그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많이 식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범인은 영주의 아들입니다.'
문득 왕비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습니다.

또 하나를 들자면, 이루릴의 역할이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균형을 잡는 신들의 역할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드래곤을 보살피는 듯 하지만 이전에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드래곤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드래곤들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선 오랜 친구인 드래곤 레이디와 맞서 싸울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드래곤 라자'의 이그누스 드래곤이 그러했듯(그러하다고 언급되었던 듯) 완전히 균형을 잡는 것은 어느 하나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황희 정승처럼 니말도 옳다, 니말도 옳다 식의 좋은게 좋은거라는 자세가 아니라 전체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단수의 존재가 아닌 인간보다는 엘프나 드래곤에게 그 역할을 맡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비인간적인 캐릭터를 이용하더라도 캐릭터가 너무 작위적이거나 어설픈 구성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판타지 소설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드래곤 라자'에서 이루릴과 인간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얼마나 많은 통찰을 선보였던가

마지막으로는 시간에 대한 관심 또한 '퓨처 워커'에서 드러냈던 핵심 주제 중 하나였다. 물론 그림자 지우개를 통해 발생한 수없이 많은 시간의 변화와 그로 인한 혼돈은 '퓨처 워커'에서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자신의 현재로 대신하려던 악역 때문에 발생했던 혼돈과 다르기는 하지만.

내가 '눈물을 마시는 새'나 '피를 마시는 새'는 읽어보지 않아서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그 작품들에 관련된 요인도 있을거라 생각한다. 물론 이 작품이 '드래곤 라자'의 후속편이기 때문에 '드래곤 라자', '퓨처 워커'의 내용과 그 안에 들어있던 생각을 더 많이 따왔는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작가들이 그러하듯 이영도도 평생을 두고 추구할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종이책과 가격이 큰 차이가 안나서 고민하다가 전자책으로 사서 읽었는데 멋진 표지(다 읽고 나서 표지를 다시 보니 왜 표지의 주인공이 '그' 드래곤인지 알겠더라)에 한 권 밖에 안된다는 걸 생각하면 종이책으로 살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고 다시 볼 것 같은데 아쉽네.

드래곤 라자를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직 못 읽어본 모든 사람에게 강추.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을 좋아한다면 추천.
판타지 소설은 유치하기만 하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추천.


덧. 뱀파이어도 천년은 살지 못하는 것인지 결국 타이번은 결국 출연하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도 펫시를 가진 뒤에는 늙어 죽어버린건가.  

by 청춘한삼 2014. 2. 10. 21:39
셜록 홈즈.
홈즈가 등장한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그 이름은 한 번 정도 들어보지 않았을까. 대다수의 어린이들이 꿈꾸는 모험과 긴장감에 더불어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홈즈 시리즈에 나 또한 빠졌었다. 아니, 빠졌다고 하기에는 많은 작품을 읽어보지는 않았었긴 하다. 단편 몇 편 정도.

코난 도일을 읽는 밤 - 셜록홈즈로 보는 스토리텔링의 모든 기술
카테고리 인문 > 독서/글쓰기
지은이 마이클 더다 (을유문화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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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홈즈를 어떻게 만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학교 도서관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친구 집에 놀러갔다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책은 기억하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한 권이 홈즈 단편 몇 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도난 당한 잠수함 설계도를 찾는 이야기(아마 브루스 파팅턴 설계도)를 비롯해 '너도밤나무 집', '도둑맞은 시험문제' 정도가 기억난다. '얼룩 끈의 비밀'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재작년 정도까지도 본가에 책이 있어서 한번씩 읽어보곤 했지만 책을 기부해버리고나니 더이상 볼 수가 없다. 

학교에 있는 동안, 정확히는 2011년 12월부터 2012년 1월 정도까지 학교 전자도서관에서 홈즈 단편선을 모조리 읽었었더랬다. 전자책을 사면 한권에 500원 정도 하는 것 같던데 어차피 도서관에 있으니 다 빌려봤었다. 재밌게 읽기는 했는데 장편이 없다는 것이 좀 아쉬웠다. 번역을 좀 대충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홈즈가 등장하는 장편은 '네 개의 서명'과 '춤추는 사람 암호'를 읽어봤었다. 다른 작품도 읽어봤었는지 기억이 잘 안나지만 아마 어릴 때 더 읽어보긴 했었을 듯. 하지만 '네 개의 서명'과 '춤추는 사람 암호' 역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마 부산 추리문학관에 갔을 때 읽었던 '주홍색 연구'는 조금 기억이 나는 장편이기는 하다.

사실 코난 도일은 홈즈 시리즈만 썼던 것은 아니다. 내가 읽어 본 작품은 '잃어버린 세계' 밖에 없기는 하지만 그 작품의 챌린저 교수 역시 홈즈만큼이나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이전에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리뷰를 썼던 기억인데 어찌된건지 이 블로그에 없다. 아마 이전에 운영하던 블로그에 있었던 듯 한데 백업 데이터가 티스토리에서 제대로 복원이 안되서 이제 영영 볼 수 없는 글이 되버렸다는게 아쉽다.

책의 저자인 마이클 더다는 이런 나와는 비교도 안되는 셜록 홈즈 매니아다. 셜록 오타쿠라고 할까나, 서양이나 셜록 너드라고 해야하려나. 아니, 이렇게 말하는거보단 '베이커 가 특공대' 회원이라고 하는게 제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인듯하다. 그런 저자가 자신과 셜록 홈즈와의 인연, 베이커 가 특공대 모임, 코난 도일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어찌보면 코난 도일에게 바치는 헌정으로 볼 수도 있고, 셜록 홈즈와 코난 도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책이기도 하다. (책에는 '베이커 가 특공대'에게 바친다고 되어있다) 본문에서는 아래와 같이 셜록 홈즈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살아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홈즈의 공적을 기록한 왓슨의 글을 읽게 된다. 어릴 땐 능란하게 유지하는 속도감과 스릴 넘치는 줄거리 때문에 읽는다. 더 나이가 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정의로워 보이던, 혹은 최소한 이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던 시절, 가스등 불빛이 은은하게 빛나는 아득한 1895년으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에 읽는다. 성인이 된 다름엔 베이커 가의 하숙생활을 묘사한 삽화들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탐정과 의사 간에 오가는 대화에 미소 짓거나, 너무나도 매혹적인 홈즈 특유의 관용구가 등장하길 애타게 기다리면서 읽는다.


책의 원제는 'On Conan Doyle'이고 부제는 'The whole art of storytelling'이다. '코난 도일을 읽는 밤'은 정말로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내용과도 연관이 되어 있으면서도 낭만적인 느낌을 주고, 책의 표지와도 잘 어울린다. 다만 부제를 '셜록 홈즈로 보는 스토리텔링의 모든 기술'이라고 붙였는데 '셜록 홈즈'를 추가해서 홍보와 판매량을 늘려보겠다는 의도가 보인다는 점이 아쉽다. 책의 내용은 '셜록 홈즈'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코난 도일'의 작품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셜록 홈즈의 비중이 높기는 하지만) 특히 나도 읽어보았던, 챌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잃어버린 세계'를 비롯한 시리즈나 코난 도일이 홈즈 시리즈보다 더 선호했던 역사소설 이야기도 다루면서 코난 도일의 작품 세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안내한다.  

후세의 독자들은 너무나도 자주, 어떤 작가의 천재성이 다방면에 걸쳐 있다는 사실에 관계없이 대표작 한두 편 정도로만 그를 기억하곤 한다. 빅토리아 시대 소설 연구자들을 제외한다면, '허영의 시장'말고 윌리엄 새커리의 또 다른 소설을 읽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고독을 훌륭하게 묘파했던 샬럿 브론테의 '빌레트'는 '제인 에어'에 가려졌다. 셜록 홈즈가 누렸던 전 세계적인 인기는 처음부터 그 창조자의 심사를 건드렸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탐정의 모험담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지만, 코난 도일이 썼던 다른 모든 작품에서 광휘를 빼앗아 버렸다. '잃어버린 세계' 정도가 부분적인 예외였다. 하지만 '얼룩 띠의 비밀', '바스커빌 가문의 개', '기어 다니는 남자' 등 홈즈의 주요 작품에 걸쳐 되풀이 등장하는 고딕적인 요소는 적어도 아서 코난 도일이 무서운 소설 세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 책은 애정이 가득한 비평서 혹은 안내서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셜록 홈즈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었던 경험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이 두껍거나 내용이 어렵지도 않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있다. 흔히 '양덕'이라고 하는 서양 덕후들 중 셜록 홈즈 덕후들은 어떻게 노는지를 알고 싶은 사람 역시 읽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셜록 홈즈를 좋아한다면 추천.
코난 도일의 다른 작품에 대한 소개를 원한다면 추천.
셜록 홈즈 덕후들이 어떻게 노는지 알고 싶다면 강추.


덧. 오타 지적.
  180페이지 주석에 '여섯 점의 나폴레옹 상 The advanture of the Six Napoleons Six Napoleons'에서 나온 이름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보면 알겠지만 Six Napoleons가 두 번 적혀있다.

관련글
 2013/02/11 - [그남자와 책] - 셜록 홈즈 : 실크하우스의 비밀 - 그가 돌아왔다
by 청춘한삼 2014. 1. 11. 22:03
어느새 2013년도 마지막이다. 개인적으로 올해는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큰 변화를 겪은 해이다보니 시간이 좀 더 빨리 흐른 것 같기도 하다. 안그런 해가 없기는 했지만 특히 어떻게 시간이 갔나 싶은 한 해다. 

책읽기만으로 한정해서 보면 2013년은 상고하저다. 1월에서 4월까지는 열심히 읽어나가다가 바빠지면서 점점 완독한 책이 줄어들고 여름 이후에는 진도가 잘 안나가는 한해였다. 그러면서 블로그에 포스팅도 작년에 비해 훨씬 덜 한 것 같은데 지금 세어보니 큰 차이는 없다. (연말 정산 외 책 감상 포스팅만 2012년 30개, 2013년 29개) 하반기에 지지부진하다보니 그렇게 느꼈나보다. 

작년에 이어 2013년 한 해 동안 읽은 책 중 기억에 남는, 남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 몇 권을 골라본다. 순서는 무작위이니 책들 앞의 숫자를 순위로 생각하지는 마시길. 

 2013년 그남자가 읽은 책 중..

1.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김태권)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군중십자군과 은자피에르
카테고리 역사/문화 > 서양사
지은이 김태권 (비아북,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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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2: 1차 십자군과 보에몽
카테고리 역사/문화 > 서양사
지은이 김태권 (비아북,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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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3
카테고리 역사/문화 > 서양사
지은이 김태권 (비아북,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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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4
카테고리 역사/문화 > 서양사
지은이 김태권 (비아북,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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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김태권'이 쓴 '십자군에 대한 이야기'다. 4권까지 봤는데 책 정보를 첨부하다보니 알게 모르게 여름에 5권이 출간되어 있었다. 내용은 인터넷 서점에서 연재되고 있으니 원한다면 찾아가서 한번 보는 것도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인류가 저지른 가장 어리석은 짓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십자군 원정을 현재의 시대와 더불어 바라볼 수 있는 책이다. 저자의 썰렁한 유머를 참아낸다면 기대보다 많은 것을 얻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2013/03/01 - [그남자와 책] -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2.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세트
카테고리 역사/문화 > 서양사
지은이 시오노 나나미 (문학동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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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도 역시 십자군 이야기다. 하나에 꽂히니 다른 것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최근에 출간되었고 네임밸류도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 금방 보이더라.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처음 읽었는데 왜 유명 작가인줄 알겠더라. 술술 읽히는 것이..물론 저자가 아닌 역자의 능력일수도 있기는 하지만. 십자군 원정에 대해 궁금하다면 강추한다. 
2013/03/09 - [그남자와 책] - 십자군 이야기 1 - 시오노 나나미
2013/04/06 - [그남자와 책] - 십자군 이야기 2 - 시오노 나나미
2013/04/13 - [그남자와 책] - 십자군 이야기 3 - 시오노 나나미


3.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빌 브라이슨)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카테고리 여행/기행 > 해외여행
지은이 빌 브라이슨 (21세기북스북이십일,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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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어 본 여행기 중 가장 재미있는 작품. 빌 브라이슨과 유머 코드가 맞다면 최고의 책이 아닐까. 
2013/04/28 - [그남자와 책] -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빌 브라이슨
2013/04/24 - [그여자와 책] - 발칙하다 못해 유쾌하다! 발칙한 유럽산책


4. 욕망해도 괜찮아 (김두식)
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김두식 (창비,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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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교수 아저씨의 자기고백. 이런 책을 하나 내놓으면 이후로 세상 살기 편해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소 욕망과 규범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에 대한 갈등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기에 사람들이 이 책을 한번씩은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창비 팟캐스트를 통해서 목소리와 유머감각을 접하고 조금 실망하기는 했지만 글은 믿을만하다. 
2013/05/26 - [그남자와 책] - 욕망해도 괜찮아 - 김두식
2013/05/21 - [그여자와 책] - 욕망해도 괜찮은 거겠죠?


5. 만화로 보는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 (마이클 굿윈)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 - 자본주의 탄생에서 세계금융위기까지 경제는 어떻게 작
카테고리 경제/경영 > 경제일반
지은이 마이클 굿윈 (다른,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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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 더불어 만화로 된 교양서. 경제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 쉽게 알려주는 책은 흔치 않다. 
2013/12/03 - [그남자와 책] - 만화로 보는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

6.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사람의목소리는빛보다멀리간다위화열개의단어로중국을말하다
카테고리 역사/문화 > 동양사
지은이 위화 (문학동네, 2012년)
상세보기
현재의 중국이 어떤 과거를 딛고 현재의 중국이 되었는지를 위화가 보고 겪은 과거와 현재를 통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올해 '허삼관 매혈기'도 읽었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좀 더 기억에 남고 의미있다.
2013/03/31 - [그남자와 책] - 사람의 말은 빛보다 멀리간다 - 위화


베스트 1, 3, 5, 10 정도를 뽑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나까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 6개만 뽑았다. 이 외에도 기억에 남는 것들이 더 있기는 하지만 이미 포스팅 한 것들도 있고 아닌 것들도 있고하니. 재미도 없는 포스팅의 스크롤을 끝까지 내리느라 수고한 당신에게 2014년에는 2013년보다 더 나은 한해가 되길 빌며 이만 끝. 
by 청춘한삼 2013. 12. 31. 21:09
모든 사람이 경제 때문에 울고 웃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면서도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를 설명해주는 틸인 경제학에 대해서는 어렵다는 이유로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만화로 보는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의 저자인 마이클 굿윈은 사람들이 가진 경제에 대한 의문들, '나는 왜 우리 부모만큼 잘살 수 없는 걸까?', '내년에도 직장을 다닐 수 있을까?', '우리 애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와 같은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들려주는 책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책을 쓰게 되었다. '답답하면 니들이 책을 쓰든지'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지식을 뽐내기 위해 어렵기만 하게 책을 써온 학자와 지식인들에 대한 대답의 의미도 있겠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경제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해답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쉽게 경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 - 자본주의 탄생에서 세계금융위기까지 경제는 어떻게 작동해 왔는가
카테고리 경제/경영 > 경제일반
지은이 마이클 굿윈 (다른,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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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목에 '만화로 보는'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말랑말랑하고 쉽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책의 주목적이 재미가 아닌 정보전달이기 때문에 만화치고는 글도 많은 편이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떠올리면 비슷하려나. 하지만 글만 있는 것보다는 그림이 있는 편이 더 쉽게 집중할 수 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만화이기 때문에 그림도 중요한데 일본이나 우리나라 만화책에서 주로 보이는 그림체보다는 서양 만화의 그림체라고 생각하면 된다. (미국 사람이 그린거니 당연한거기도 하지만..) 표지의 그림이 전형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책의 구성은 기본적으로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다. 아담 스미스 이전부터 오늘날까지를 시대에 따라, 중요한 경제적 사조에 따라 챕터가 나뉘는데 중간중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거나 뛰어넘기도 한다. 이 책은 경제학을 시대에 따라 가르치는 것보다는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빈번하게 직접 등장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나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비교적 알기 쉽게 썼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비단 내용을 정리하고 설명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용어들에 대한 주석이 잘 달려있기도 하고 인덱스와 참고 문헌도 잘 정리되어 있어 익숙하지 않은 용어가 나오거나 다시 찾아볼 내용이 있거나 하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편이다. 단점도 없지는 않은데 그 중 하나는 미국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일 것이다. 이 부분은 저자도 본인이 미국인이고 미국의 경제제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어차피 미국이 전 세계의 경제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나라 중 하나라는 점에서 미국의 경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국 경제에 집중한 것이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둘 다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해 파헤치고 (다른 책들에 비해) 알기 쉽게 설명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경제적 현실이 어려운 시기에 쓰여졌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를 거치면서 쓰여져 대공황 이후 세계가 어떻게 될지 의문을 던지며 책이 마무리 되었다. 이 책은 금융위기와 이후 현재 나타나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과 그에 대한 해결책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말하며 끝난다. 

저자가 언급한 해결책에 대한 내용 중 한 부분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핵심은 민주주의입니다. 모두가 계획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동의하지 않는 소수도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경제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경제는 잘 작동되고 있을 때에도 심각한 결함들이 나타났다. (...) 이 결함들을 고치려면 경제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어떤 일자리를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건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다. (...)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법을 통한 해결만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선택을 통해 지금 여기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말한 해결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저자는 현재의 경제상황 -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대기업이라든지 선진국과 WTO 등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적인 형태의 세계화, 환경오염과 같은 - 과,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더 상황을 악화시키는 정책을 원하는 정치인들에게 비판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종북 취급을 받겠지만 사실 그는 미국의 민주당 입장에서 조금 더 진보적인 수준으로 보이는 정도다. 사실 둘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 것일지도. 그러니 정치적인 색안경을 끼고 이 책을 보거나 안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경제학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거나 쉽게 정리하고 싶다면 강추.  


참고 
자본주의역사바로알기 상세보기

 
by 청춘한삼 2013. 12. 3. 18:34
관련글 : [그여자와 책] - 산을 탐독하라.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이하 유럽산책)' 이후 두번째 읽는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다. 책에 대한 전반적인 평이나 유명세가 '유럽산책'보다 좀 더 좋은 편인 듯 해서 벼르고 있다 보게되었다. 이전에 Gene이 쓴 글에 나온 것처럼, 그리고 아래 책 소개에 나와있듯이 이번에는 빌 브라이슨이 애팔래치아 산맥 트래일 종주를 시작했다.
 

'유럽산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을 떠나는 거창한 목적은 없었다. 물론 여러 구실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시작은 다음에 나오는 것처럼 단지 집 근처에 트레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뉴햄프셔 주의 작은 마을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돼 우연히 마을 끝에서 숲으로 사라져 가는 길을 발견했다.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었다. 그 유명한 '애팔래치아 트레일'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 트레일은 장거리 종주 등반의 원조로 불린다. 미국의 동부 해안을 따라 고요히 솟아 있으면서 은근히 사람의 발길을 부르는 애팔래치아 산맥 위로 굽이굽이 3천360킬로미터나 흐르는 길이다.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까지 14개 주를 관통하면서 이름만 들어도 맘에 설레는 블루리지, 스모키, 컴벌랜드, 그린 마운튼, 화이트 마운튼을 지나간다.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튼'이라든지 '셰넌도어 국립공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주의자 존 뮤어가 표현한 대로 빵 한 덩어리와 차 한 봉지를 낡은 배낭에 넣고서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달려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내가 막 정착한 뉴잉글랜드의 조그만 마을에 뜻하지 않게도 이 트레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이 길을 따라 조지아 주까지 2천880킬로미터를 걸어서 가거나, 또는 반대방향을 택해 거칠고 돌이 많은 화이트 마운튼을 따라 720킬로미터를 걸어서 몇 사람 경험해보지 못한 전설적인 마운트 캐터딘 산을 밟아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뜨거워졌다. '근사하지 않은가. 당장 바로 하자'는 충동이 불끈 솟았다. p.13-14

이렇게 시작된 트레일 종주에는 '유럽산책'에서도 저자의 추억 속에 등장했던 친구인 카츠도 함께 한다. 십수년 만에 다시 만나서 처음엔 어색하고 서로 맞지 않지만 점점 서로에 대한 믿음과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카츠 외에도 메리 앨런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만나 고생을 하기도 하고 서로 도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내 앞에 펼쳐진 새로운 길 앞에서 그 여행이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여행의 한가지 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잡학다식한 빌 브라이슨답게 이 책에서도 자신의 박식함, 혹은 박식해보이는 능력을 뽐낸다. 물론 소재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이다. 트레일의 위험요소인 흑곰이나 그 외에 트레일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동물들, 트레일의 역사와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 생각과 잘 버무려 풀어낸다. 또한 트레일 관리를 맡은 공원관리국의 공원파괴 행위라든가 하는, 트레일과 트레일하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행정, 관리 부실 등에 대해서도 제 목소리를 낸다. 개발구역도 아닌 자연보호 공원에서 자연파괴가, 그것도 공원 환경을 보호해야 할 공원관리국에 의해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데 내용을 조금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도롱뇽보다 더 다양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종이 '민물 홍합'이다. 세계 전체의 3분의 1인 300종의 홍합이 여기에 서식한다. 스모키 홍합은 자줏빛 사마귀 등, 빛나는 돼지 발톱, 원숭이 얼굴 진주 홍합과 같이 괴이한 이름들로 불린다. 불행히도 그들에 대한 관심은 이것으로 끝이라는 점, 심지어 자연주의자들로부터도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홍합은 놀라운 속도로 사라져갔다. 스모키 홍합종의 거의 절반이 멸종 위기에 있으며, 12종은 이미 소멸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자연보호 공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놀랄 만한 일이어야 한다. 홍합들이 알아서 지나가는 차에 돌진해 바퀴 밑에 깔리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모키는 대부분의 홍합을 잃어버리는 과정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실제 국립공원관리국은 뭔가를 멸종시키는 게 전통인 듯 싶다. 브라이스캐니언 국립공원은 아마 가장 흥미로운 사례일 것이다. 1923년에 창설된 이 공원은 자신이 관리를 시작한 지 반세기도 안되어 7종의 포유류 - 흰꼬리 산토끼, 들개, 영양, 날라다닐 수 있는 다람쥐, 비버, 붉은 여우, 점박이 스컹크-가 멸종되었다. 이런 동물들이 브라이스캐니언에서 공원관리국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기 전 수백만 년을 생존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으로 놀라운 업적이다. 모두 함께 42종의 포유류가 20세기에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멸종되었다. p.149

물론 트레일을 걷는 동안 이런 설명만 늘어놓지는 않는다. 빌 브라이슨답게 책 곳곳에 유머가 도사리고 있고, 여행기답게 트레일을 걷는 동안 자신 앞에 펼쳐진 놀라운 자연을 보고 감탄하며 즐기기도 하고, 힘들어 불평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힘들어하는 시간이 길었던 브라이슨과 카츠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을 느끼고, 나중에는 오히려 도시에서 더 낯설고 어색함을 느끼기도 한다.

죽을 고비까지 넘겨가며 힘들게, 그리고 의외로 열심히 트레일을 걸었던 저자와 카츠의 모습을 보다보면 도시를 떠나고 싶어하는 현대의 도시인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유행이 된 캠핑은 이런 욕망을 가장 현실적으로 해소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주말에 잠시 교외나 캠핑장으로 캠핑을 가는 심리에는 언제든 다시 익숙한 도시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생각이 깔려있다. 하지만 브라이슨과 카츠는 훨씬 더 긴 시간을, 산속에서의 캠핑이 그들의 새로운 일상이 될 정도를, 산속에서 보냈다. 비록 완주를 하지도, 모든 경로를 걸어간 것도 아니지만 진짜 도전을 한 것이다. '유럽산책'에서도 그랬지만 브라이슨의 여행기에서는 언제나 '도전'이 있다. 카츠와 함께 유럽여행을 한지 20년 만에 혼자 유럽 곳곳을 걸으며 여행했었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카츠와 함께 3천 킬로미터가 넘는 트레일에 나선다. 그것도 뚱뚱한 중년이 되어서.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애팔래치아 산맥이었다.(물론 '나를 부르는 숲'이라는 제목은 국내 출판사에서 지은 것이다만) 브라이슨 외에도 나를 비롯한 누구에게나 '나를 부르는 어딘가'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머리 속에 많이 떠올랐던 장소는 제주도 올레길이었다. 완전히 산 속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시숲의 길도 아니다. 산도 있고 바다도 있다. 자연 그대로 보존된 곳도 있지만 사람이 사는 지역도 지나간다. 브라이슨 표현에 따르면 '인간세계로부터 보호된 복도'가 아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세계도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곳이다. 언제쯤 가볼지 확실히 알수는 없지만 시간을 잘 정해서 내 앞에 놓인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 때까지 파괴되지 않고 잘 보존되길 바라고, 올레길을 가기 전엔 부산의 문탠로드나 이기대를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다.

트레킹을 좋아한다면 강추.
자연을 즐기는 여행을 좋아하고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추천.
빌 브라이슨의 다른 여행기를 재밌게 읽었다면 추천..하지만 '유럽산책'만큼의 개그와 말장난은 없는 듯.
뚱뚱한 중년 아저씨들의 도전과 모험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추천.

덧. 번역이 잘못된 것 같은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만든 사람 중 한명의 이름이 '매카이(p.50)'와 '매카이에(p.230~)' 둘로 혼용된다.
덧2. 이 책이 교양과학으로 분류된 건 아마 분류하는 사람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보고 같은 저자이니 읽어보지도 않고 같은 분류로 넣어버린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그래도 과학책은 아니지 않나.

by 청춘한삼 2013. 10. 3. 18:31
과학 서적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읽히는 일은 흔치 않다. 그나마 인문학 책이라면 '총균쇠'처럼 서울대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책이라든가 하는 홍보에 좋은 이벤트가 있거나,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시대를 꿰뚫는 제목을 통해 많이 팔리는 책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학 분야라면 스티븐 호킹 정도 되는 저자가 신간을 내는 정도 되야 베스트셀러 순위에나 잠시 들어보지 않을까 싶다. 과학 서적에 대한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1976년에 출간된 한 과학 서적이 아직도 멸종되지 않고 팔려나가고 있으니..바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이다. (물론 '이기적 유전자'만이 과학 분야 스테디셀러는 아니다)
이기적유전자
카테고리 과학 > 교양과학
지은이 리처드 도킨스 (을유문화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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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출간된지 오래된만큼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은 널리 알려진 편이다. 제목만 봐도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잘 설명하고 있을 것만 같은,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논란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는 책의 내용은 보지 않고 '이기적'이라는 단어에 꽂힌 사람들의 비난이 한 몫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도 유명하고 오래된 책이라 아마도 많은 매체와 사람들이 리뷰를 해놨을 것이므로 내용을 꼬치꼬치 적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책의 내용의 핵심은 모든 생물은 '유전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아니, 진화만이 아니라 행동과 생존에 대한 모든 것이 '유전자'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진화는 유전자 풀 속에서 어떤 유전자는 그 수가 늘어나고 또 어떤 유전자는 수가 줄어드는 과정이다. p. 102

동물의 행동은, 그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가 그 행동을 하는 동물의 몸 내부에 있거나 없거나에 상관없이 그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의 생존을 극대화하는 경향을 가진다. p. 410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으로 알려진 다윈의 진화론은 창조론 신봉자들 외에는 널리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의 단위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 단위가 종일수도, 개별 개체일수도 있을텐데 도킨스가 말하는 단위는 '유전자'이다. 인간을 예로 들자면, (인간에게 있어 일반적인 행동인) 성공을 바라는 개개인 행동은 자신(개별 개체)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공을 하는 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를 퍼트리는데 유리하기 떄문이다. 인간의 생존 또한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론에 따르면,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이승에 있어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승에 있어야만 유전자를 하나라도 더 남길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는 '이기적'이지만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자가 말했듯이 측은지심, 즉 이타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대상이 가족 혹은 친지들과의 관계일 것이다.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도 이타적인 면을 보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가족이나 친지들과의 관계에서 서로가 좀 더 이타적이다.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 지배받는다면 이타적인 행동 역시 유전자가 시켜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책에서는 그들이 자신과 일정부분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희생해 발생한 손해보다 가족, 친지들에 의한 유전자 번식의 이로움이 더 크다면 이타적인 면이 발휘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나와 유전자를 나누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개체에 대해서는 배타성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배타성을 보이는 것 중 하나는 인종 차별이다. 책에서는 유전자에 의한 잘못된 배타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만일 동물들이 자기와 신체적으로 닮은 개체에게 이타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동물들은 간접적으로 자기의 친척에게 어느 정도 이익을 주는 셈이 된다. 해당 종이 갖는 여러 특성에 따라 많은 부분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라도 이러한 규칙은 다만 통계적 의미에서 '올바른' 결단을 이끌어 낼 뿐이다. 조건이 달라지면, 예를 들어 어떤 종이 훨씬 큰 집단에서 생활하게 되면 그 규칙은 그 종의 동물들에게 잘못된 결단을 내리게 만들 수 있다. 상상컨대, 인종 편견이란 신체적으로 자기와 닮은 개체를 인식하고 겉모양이 다른 개체에게 못되게 구는, 혈연 선택을 거쳐 진화해 온 경향이 비이성적으로 일반화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어느 정도는 의도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유전자'라는 단일한 코드를 통해 대답을 줄 수 있다. 어려운 철학책을 읽는 대신 과학을 통해서도 철학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이 책이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이다. 

덧. 유전자의 진화에 대한 개념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저자가 책에서 제시한 '문화(밈, Meme)'의 진화 이야기가 이해를 도울거라고 생각한다. 

덧2. 책의 12장인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한다'의 내용에 흥미가 있다면 '협력의 진화'를 읽어보길 추천. 이전글 : 협력의 진화 - 서로 도우며 착하게 살자

이 책을 읽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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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춘한삼 2013. 9. 20. 13:47
우리나라에서 살면서 한번도 읽어보지는 않을 수 있어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기는 어려운 소설 중 하나가 삼국지이다. '고우영 삼국지'와 같은 만화도 있고 스테디셀러 중 하나인 '이문열 삼국지'를 비롯해 수많은 저자들에 의해 편찬된 삼국지 판본들이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비, 관우, 장비 이외에 조조, 원소, 원술, 손견, 손책, 손권, 공융, 유표 등등 수많은 등장인물들에 지쳐 끝내 사마염의 천하통일을 보지 못하고 책을 덮어버리곤 하지만. 
 

삼국지 강의 / 역사와 문학을 넘나들며 삼국지의 진실을 만난다!
카테고리 역사/문화 > 동양사
지은이 이중톈 (김영사, 2007년)
상세보기

앞에서는 '삼국지 판본들'이 있다고 적었지만 정확히 말하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이하 연의)' 이후로 나온 소설들은 모두 '연의'의 새로운 판본들이라 할 수 있다. 나관중은 정사 삼국지를 토대로 소설을 썼고,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읽힐 정도로 소설 '연의'는 성공했다. 

'연의'가 재미도 있고, 배울 점도 많은 소설이기는 하지만 독자들은 '연의'가 소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망각하고 소설의 내용을 모두 진실로 믿어버리곤 한다. 실제 역사의 기록이라고 해도 내용을 기록한 필자에 따라 기술되는 내용이나 관점, 평가 등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 주변의 신문, 방송 등을 통해 누구나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정사'도 그러한데 '소설'은 오죽하랴. 

'연의'에서는 유비와 그의 세력을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에 그와 대비되는 인물들은 흔히 '악' 혹은 '바보'로 묘사된다. 이를 위해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이 실제와는 다르게 묘사되고 평가받아왔다. 이중톈의 강의를 묶은 '삼국지강의'에서는 이런 점들을 지적하고 '연의'와 실제 역사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연의'에서 가장 손해를 보는 인물은 아마도 조조일 것이다. '연의'에 나오는 조조의 이미지는 한나라를 계승하려 하는 유비에 대항해 황제를 끼고 한나라를 유린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운 '간웅'이다. 하지만 이중톈은 이런 이미지가 잘못된 것이며 조조는 영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총 24강의 강의 중 절반인 12강이 조조에 대한 내용이다. 

조조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쉽지 않다. 나관중이 '연의'에서 조조를 부정적으로 그렸을 뿐 아니라 정사의 일종인 '자치통감'에서도 조조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일부러 조조에 유리한 사료를 삭제하며 조조를 나쁘게 그렸다. 이 외에도 조조를 긍정적으로 그린 사료, 부정적으로 그린 사료가 난립하며 조조의 진짜 모습을 알기 어렵다. 

하지만 조조가 부정적 평가를 받는데 주요한 사건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연의'에서 자신을 환영해준 여백사 가족을 죽이고 '차라리 내가 천하 사람들을 배신할망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게 하지는 않겠다'라는 말을 남긴 사건이다. 이중톈은 다른 기록들을 통해 조조가 살인을 행한 배경을 살펴보고, 조조가 실제로 했던 말은 '차라리 내가 남을 배신할망정, 남이 나를 배신하게 하지는 않겠다'라는 것을 지적했다. 두 말의 차이는 적용되는 범위는 물론이고 평소 소신인지 비단 그 사건에 대한 의견인지도 다르다. 

이 외에도 인재를 대하고 활용하는 용인술, 백성들에 대한 배려, 군주로서의 태도, 인성과 인심의 통찰능력 등을 포함해 조조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장점들을 통해 훌륭한 군주로 조조를 재평가한다. 이에 더해 조조에게 패했던 원소나 원술, 여포 등이 성공할 수 없을 수 밖에 없는 이유들도 보여준다. 

책의 뒤쪽 절반은 유비와 손권에 대한 내용이다. 유비와 손권이 꿈꿨던 삼분지계(융중대책), 삼고초려, 신화와 같은 적벽대전에 대한 진실과 허구와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이 중 '연의'에서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적벽대전에 대한 내용을 조금 옮기면 아래와 같다. 

규모가 비교적 큰 전쟁이었던 적벽대전은 계획, 준비, 교전, 완성의 4단계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삼국연의'에 매우 훌륭하게 씌어 있어, 중국 고대 문학에 소중한 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문학은 역사가 아닙니다. '삼국연의'에서 8회나 되는 분량을 들여 매우 다채롭게 묘사하고 있는 전쟁의 과정, 특히 인구에 회자되는 고사들은 대부분 지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여기에도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역사상 전혀 근거가 없는 경우입니다. '여러 유생들과 설전을 벌이다', '지혜로 주유를 격분시키다', '감택이 거짓 항복 문서를 바치다', '방통이 계책을 바치다', '동풍을 빌리다' 등이 그런 사례입니다. 다른 하나는 약간의 근거는 있지만, 교묘하게 내용을 바꿨거나 심하게 과장한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장간이 계책에 빠지다'는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장간이라는 사람은 있었고, 그는 주유의 진영에 왔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온 것은 적벽대전이 끝난 후입니다. '자치통감'에 건안 14년(209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당연히 계책에 속아서 조작된 편지를 훔쳐 읽었다거나 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 다시 말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약간의 가능성 있는 이야기는 '풀배로 화살을 빌린 것'인데 이 사건의 발생은 더욱 늦어 건안 18년(213년)입니다. 더구나 사건도 손권에게 벌어졌고, 또 화살을 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실상 '풀배로 화살을 빌리는 것'은 기술적으로 절대 불가능합니다. 누군가가 이미 이에 대한 득실을 계산했으므로,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삼국연의' 속에 소개된 수많은 멋진 전투는 모두 역사적으로 벌어지지 않았던 듯합니다. 
이 전쟁에 대한 정사의 기록은 매우 간략합니다. 그리고 진수 자신의 주장도 매우 모순적입니다. 예를 들어, 적벽에서 일어난 큰불은 도대체 누가 놓았을까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선주전'과 '주유전'에서는 배에 불을 놓은 것이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라고 말하고, '곽가전'과 '오주전'에서는 조조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독자들의 읽는 데에 영향을 끼치지 않기 위해, 저는 이 두 가지 주장을 모두 아래에 나열하겠습니다. 


위에 적은 것처럼 적벽대전 외에도 '연의'에서 유비와 손권에 대한 여러 거짓들을 알려준다. 물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식의 폭로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삼국지 내용이나 사건들에 대해 일반 독자들이 놓치기 쉬운 의미를 알려주기도 한다.  

이중톈의 '삼국지강의'에서 가장 뛰어난 점은 '연의'가 아니라 진수의 (정사) '삼국지', 배송지의 주 등 정사 사료들을 토대로 논의를 진행한다. 그리고 여러 사료들을 검토하기 때문에 실제 역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책이 두껍기는 하지만 '연의'와는 또 다른, 하지만 '연의'만큼 재미있게 진짜 역사를 알 수 있다. 또한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를 엮은 책이기 때문에 위의 발췌부분에서 보듯이 쉬운 언어로 읽기 좋게 나와있다는 점도 장점이라 볼 수 있겠다. 

 

'삼국지연의'를 좋아한다면 추천. 
숨겨진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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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춘한삼 2013. 9. 7. 15:12
'프랑스 파우더 살인사건' 이후 오랜만에 읽어본 엘러리 퀸의 작품. 
국명 시리즈를 내놨던 '검은숲'에서 국명 시리즈 이후 비극 시리즈도 내놓았다는 소식에 찾아보니 이미 모든 비극 시리즈가 출판되어 있었다. 차례대로 읽어볼까 하다가 일단 가장 유명하고 좋은 평을 듣는 'Y의 비극'부터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Y의 비극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엘러리 퀸 (검은숲,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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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책 표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본적인 책의 디자인은 국명 시리즈와 같다. 책의 크기라든가 표지의 글씨체, 띠지의 크기를 비롯한 디자인 등이 모두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띠지의 색이 붉은 계통에서 검은색으로 바뀌고 작가들의 사진이 없어진걸 제외하면 오래된 느낌을 주는 종이의 색과 패턴이나 속표지에 엘러리 퀸 형제가 나온 사진까지 동일하다.

나는 전혀 몰랐는데 처음 이 책이 미국에서 나올 때 작가들이 사용한 필명은 엘러리 퀸이 아니라 '바너비 로스'였다고 한다. 왜 그들이 다른 필명을 이용했었는지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Y의 비극'은 뉴욕 로어 만에서 요크 해터라는 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이후 미치광이 해터가에서 계속해서 사건이 벌어진다. 비극 시리즈에서는 엘러리 퀸이 아닌 '드루리 레인'이라는 은퇴한 연극배우가 탐정으로 등장한다. 젊고 자신만만하며 혈기왕성한 느낌의 엘리리 퀸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인다. 특히 자신이 확신을 할 때까지는 절대로 입을 떼지 않는, 신중하고도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섣불리 떠벌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고뇌하기도 한다.  

토요일이었다. 햇살은 눈부시게 강물 위에 반사되었다. 리무진에서 내린 레인은 보도를 가로질러 시체안치소의 닳은 돌층계를 지친 발걸음으로 올라갔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감수성이 풍부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벅찬 이런 비정한 일에 손을 대고 있단 말인가? 연극배우로서의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는 숱한 찬사를 받는 동시에 그에 못지않은 비난도 많았다. '세계 최고의 명배우'라는 찬사에서부터 '이 경이에 찬 시대에, 벌레 먹은 셰익스피어에나 매달리는 시대착오적인 배우'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온갖 말을 다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도와 본분에 걸맞은 예술가답게 그러한 찬사와 비난에 얽매이지 않았다. 전위적인 비평가들이 어떤 독설을 퍼부어도 레인은 자신의 사명을 다할 뿐이라는 불굴의 결의와 냉정한 신념으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째서 절정에 이른 명성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쓸데없는 일에 관여했단 말인가? 악인을 징벌하는 것은 섬 경감이나 브루노 검사 같은 이들의 임무가 아닌가? 악? 순수한 의미에서 악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탄도 원래는 천재였다. 다만 무지한 인간이나 비뚤어진 인간, 불행한 운명의 희생자들이 있을 뿐이다.


사건은 말 그대로 충격적이다. 힌트는 곳곳에 뿌려져 있지만 그와 더불어 함정도 숨겨져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던 살인도구 선택의 이유를 알았을 때 그 자체도 함정이 아닌 힌트였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못했다는..

책을 읽는 도중에도, 읽고 나서도 왜 'Y의 비극'이 그렇게도 좋은 평가를 받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전에 '로마 모자 살인사건'나 '프랑스 파우더 살인사건'을 읽었을 때 추리력과 더불어 약간의 운이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는 면이 조금 아쉬웠었는데 'Y의 비극'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엘리리 퀸 작품의 인지도가 홈즈나 아가사 크리스티, 뤼팽 작품들만큼 되지 못한데 좀 더 많은 사람들이 'Y의 비극'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나머지 비극 시리즈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강추.
엘러리 퀸의 작품에 관심이 있다면 강추.


 
by 청춘한삼 2013. 9. 1. 17:37
관련글 : [그여자와 책] - 허삼관 매혈기 - 피팔아서 영위하는 인생
             [그남자와 책] - 사람의 말은 빛보다 멀리간다 - 위화

제목 그대로 허삼관이 피파는 이야기인 '허삼관 매혈기'는 이전에 읽었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이하 목소리)'의 저자 위화의 작품이다. 이미 이전글에서 밝혔듯이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트'를 통해서 위화와 '허삼관 매혈기'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기회를 노리다 발행일로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목소리'를 먼저 읽고 '허삼관 매혈기'를 읽게 되었다.  
 

허삼관 매혈기
카테고리 소설 > 중국소설
지은이 여화 (푸른숲,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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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피를 한번 팔았던 허삼관이 피를 팔아 번 돈으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 뒤에도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피를 팔아 돈을 받고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애쓴다. 자신의 욕심을 차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피를 파는 허삼관에게서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팔며 돈을 벌어오는 가장들을 떠올리게 된다. 허삼관은 일반적인 가장들보다 더 극적인 순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며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은 자식들 때문에 오는데 아버지의 사랑도 느낄 수 있지만, 역시 자식은 리스크라는 생각도 든다. 그여자 Gene이 발췌한 부분을 봐도 그렇고.  

허삼관의 가족사를 험난하게 만드는 요인에는 중국의 현대사도 있는데 그 둘이 너무 잘 엮여 있는 점이 좋았다. 한 사람의 세치 혀에 좌우되는 문화대혁명의 분위기에 의해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허삼관 가족들과 주변 인물들, 반대로 그 와중에 완장질을 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애처롭게 나타나 있다. '목소리'에서 설명했던 '대자보'나 '청년들의 농촌생산대' 사건들이 '허삼관 매혈기'에 잘 스며들어가 있었다. 

질질 끌지 않는 이야기 전개와 사회상을 잘 녹여냈음에도 불구하고 잃지 않는 유머감각, 거기에 더해 감동까지 잘 차려진 소설을 한 상 읽은 느낌이다. 왜 위화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지를 알 것 같다. 

중국 현대사를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강추. 
가족밖에 모르는 한 자라대가리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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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춘한삼 2013. 8. 10. 20:04

관련글 : [그여자와 책] - 무인도에서의 인간 한계에 도전하다.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봤을, 설령 읽어보지는 않았을지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인물, 로빈슨 크루소. 나 역시 어릴 때 그의 모험 이야기를 몇번씩 읽어봤었다. 어릴 때 남자들이라면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모험 이야기에 관심을 안가질 수 없지 않을까. 요즘 애들은 안그러려나.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읽었던 로빈슨 크루소는 아마도 축약본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고. 그렇지만 워낙 유명한 소설이다보니 이미 여러 출판사에서 완역본이 나와있다. 내가 이번에 읽은 것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판본이다.

소설 자체는 이미 유명하기도 하고, 그여자 Gene께서 잘 요약해주셨기에 내용은 굳이 또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니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보자. 

로빈슨 크루소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대니얼 디포 (을유문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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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을 담당한 번역자는 윤해준 교수이다. 책 정보를 조금만 찾아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읽다보면 원작에 충실하게 번역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띠지에도 로빈슨크루소 작품에 대한 설명 대신 '영미문학연구회 선정 최고의 역자가 원작의 감동을 되살린 유려한 번역'이라는 문구가 들어있다. 책을 폈을 때 처음 눈에 띄는 것은 문장 하나하나가 긴 편이라는 점이다. 디포가 원작을 영어로 쓸 때 관계대명사, 부사를 붙이고 붙이며 길게 문장을 썼던 것 같은데(사실 원문을 보지 않아서 모르긴 하다만) 이것을 우리말에서 읽기 편하게 조각내지 않고 그대로 번역하였다. 어찌보면 우리 말에서는 읽기 불편하거나 어색하기도 하다. 예를 들면 책의 첫 문장이자 문단은 다음과 같다. 

나는 1632년에 요크 시에서 태어났는데, 집안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원래 그 지역 출신은 아니었으며, 아버님은 브레멘에서 온 외국인이었는데 처음엔 헐에 정착했다가 장사를 해서 쓸 만한 재산을 모은 다음엔 사업을 그만두고 이후에 요크에서 사시다 거기서 어머니와 결혼하셨는데, 외가 쪽은 그 지역의 제법 괜찮은 집안으로 성이 '로빈슨'이라, 내 이름을 '로빈슨 크로이츠네'라고 지으셨던터, 하지만 영국에서는 늘 그렇듯 말의 원음이 변질되어 우리집 성은 남들이 부르는 대로 그냥 '크루소'로 쓰기로 했으니, 내 동료들은 나를 늘 이렇게 불렀다. 


또 한가지 원본을 따르다보니 특이한 점은 전체가 하나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장의 구분이 전혀 없다. 어릴 때 읽었던 책은, 이를테면 로빈슨의 첫 항해, 조난, 탈출, 두번째 항해..등을 각각의 하나의 장으로 구분하여 두었다. 하지만 디포의 원작에서는 이런 구분이 없기 때문에 을유세계문학전집의 로빈슨크루소도 장의 구분 없이 소설 전체가 하나의 장으로 묶여있다. 이런 점도 어찌보면 독자를 조금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일 수 있을 것이다. 이쯤되면 책의 제목을 '요크 출신 뱃사람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도 놀라운 모험'이라고 적지 않은 것이 의아해진다. 

또 하나 다른 번역본들과 비교해 특이한 점이 있는데 로빈슨이 구해준 토인의 이름이다. 사람 이름은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원작 그대로 '프라이데이(프라이디로 된 책도 봤었다)'로 적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원작을 충실히 따르던 이 책은 오히려 이것을 '금요일'로 번역하였다. 로빈슨이 토인을 'Friday'로 이름 붙인 것은 그를 금요일에 구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본에서 그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로 번역하면 금요일이라는 의미가 줄어들지 않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톨킨이 그의 작품을 타언어로 번역할 때 고유명사들의 발음을 그대로 쓰지 말고 현지 언어로 바꾸라고 했던 요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하면 우리말로 원작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의 답 중 하나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금요일'이라는 번역이 앞서 언급한 긴 문장이나 장의 구성과 같은 것들보다도 띠지에 적힌 '원작의 감동을 되살린 유려한 번역'이라는 수식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번역 이야기를 제외하고, 어릴 때 읽던 축약본과 비교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소설 내의 종교적인 분위기이다. 어찌보면 로빈슨 크루소라는 한 인간이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라기보다 신을 믿지 않던 로빈슨 크루소가 독실한 신자가 되는 이야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내용은 그저 신을 믿고 찬양하게 만드는 하나의 시련일 뿐이고. 

이제 나는 내 삶의 형편을 처음보다 그 자체로는 훨씬 더 편리하게 만들어놓았고 내 몸도 그랬지만 내 마음도 훨씬 더 편해졌다. 나는 음식을 앞에 두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경우가 잦아졌고 이 광야에서 이런 성찬을 즐기게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손길에 탄복을 하곤 했다. 나는 내 처지의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바라보며 내게 없는 것보다 내가 향유하는 것들이 뭔지 따져보게 되었고, 이것이 때로 내게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은밀한 위안이 되었으니, 이런 얘기를 이 대목에서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바를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지 못하며 불평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데, 이들은 주시지 않은 것들을 보면서 그걸 탐하기 때문인 바, 이렇듯 우리가 가진 게 없다는 불만은 모두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가진 바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결여된 데서 비롯되다는게 내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로빈슨이 신에 대한 찬미와 경배를 하는 부분이 많기는 한데 스토리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보니 축약본을 만들 때 가장 쉽게 뺄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치 레미제라블에서 스토리와 직접 연관이 없는 온갖 내용들이 빠졌던 것처럼. 

로빈슨크루소의 원작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강추. 
인간의 의지와 모험, 생존에 대한 열망을 느끼고 싶다면 추천.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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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춘한삼 2013. 8. 8. 19:23
얼마전 사재기 파문이 있기도 했지만 때때로 도서 베스트셀러 순위에는 왜 올라오는지 모를 책들이 올라오고 이해할 수 없는 인기를 보이기도 한다. 주로 항상 인기를 구가하는 분야인 자기계발서나 최근 몇년간 대흥행에 성공한 속칭 힐링도서, 유명인이 추천하거나 펴낸 책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머무르는 책이다. 거기에 더해 영화의 원작(주로 소설)이 뒤늦게 뜨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 영화 개봉 즈음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이 기억이 나는 것만 화차, 은교, 파이 이야기, 레미제라블, 그리고 가장 인기를 끈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영화로 인해 다시금 떠오른 책들 중 위대한 개츠비가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많이 팔리는데는 수많은 출판사들이 영화에 편승해 엄청나게 마케팅을 한 것도 있겠지만 아마도 할인행사가 가장 큰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요즘은 한글판, 영문판 책은 기본이고 포켓판을 끼워주기도 하면서도 가격은 반값으로 팔고 있던데 그런걸 보면 도서정가제에서 제외되는 기준을 처음 책을 출판한 시기가 아니라 해당 쇄마다 따로 매겨야 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혹여라도 이 소설을 실용도서로 분류해서 도서정가제를 피해가는거라면 실용도서에 대해서도 제대로 정가제를 적용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고..그렇다. 오랜만에 잘 팔리는, 그것도 여러 출판사에서 동시에, 책이 나와서 열심히 찍어내서 파는건 이해를 하지만 상황이 정상적이진 않아보인다. 물론 나도 한글판+영문판을 절반 가격에 사긴했다만. 
 

위대한개츠비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F. 스콧 피츠제럴드 (문학동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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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트에서 김영하가 직접 번역을 하고 책에 적은 역자 후기를 접하고 관심이 생겼고 소설의 분량이 생각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소설이 두껍지 않아서 읽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전에 '레미제라블'을 읽으면서 분량이 많은 고전이 나에겐 버겁다고 느꼈었다. 당시 '레미제라블' 완역본이 나왔다는 것을 접하고 '몬테크리스토백작'과 '레미제라블' 중에 하나를 읽어보려고 했었다. 당시 레미제라블은 총 6권이었고 몬테크리스토백작도 비슷했던 것 같다. 먼저 레미제라블을 읽고 몬테크리스토백작을 읽어봐야지..라고 생각하고 레미제라블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주인공인 장발장은 1권 절반이 지나서야 등장하는데..등장인물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그 인물의 가족 내력부터 시작해서 인물에 관련된 온갖 이야기를 다 하는데..그러다보니 스토리 진행은 기대보다 항상 느린데.. 도저히 즐기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꾸역꾸역 끝까지 읽긴 했지만 다시 손이 가진 않고, 이후부터 분량이 많은 고전은 건드리지 않으려 하고 있다. 

다행히도(?) '위대한 개츠비'는 분량이 적은 편이라 읽어보게 되었는데 이미 팟캐스트를 들었기 때문에 역자 후기에 언급되었던 몇 가지를 의식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책을 읽고 보니, '내가 사전 정보 없이 이 소설을 읽었다면 지금 이만큼의 이해가 가능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소설의 분량이 적다보니 독자에게는 덜 친절한 이야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1차 대전이 끝나고 자신만만하게 세계무대로 진출하며 들떠있던 미국과 전통은 있지만 전쟁 이후 황폐해진 유럽의 시기라는 사전 이해가 부족한 나같은 사람에게는 책만 읽어서는 전혀 알아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자 후기에 나온 입이 거친 고등학생이 그런 반응을 보인게 아닐까. 번역을 맡은 김영하 작가는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 번역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부족한 사전 정보로 작가가 의도한 바를 눈치채지 못한 독자는 아침드라마꺼리도 안되는 불륜 이야기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왜 이 소설이 '영어로 쓰인 최고의 소설'이라 평가받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사전 정보의 부재가 소설의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것은 비단 이 소설만 그런건 아니다.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내가 불과 몇 십년 전 대한민국에서, 6.25라든가 4.19, 5.18같은 사건들을 정면으로 맞부딪히며 살아온 사람들이 가졌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데,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더 멀리 떨어진 소설들에 나오는 인물들을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거의 아는 것 없이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삼은 소설을 접한다면 중세의 너무나 종교적이면서도 마녀사냥과 같이 너무나 비기독교적이고 비이성적인 면이 공존하는 사회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후의 르네상스 시대, 대항해 시대, 공업화 시대, 공산주의 사회 등등 어떤 시대적(혹은 공간적) 배경이 나오더라도 내가 아는 것이 없다면 나는 현재의 기준으로 가치를 재단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이해가 힘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나는 팟캐스트를 통해 소설을 읽는 도중에 어느 정도는 의미파악이 가능하기는 했었고, 미리 팟캐스트를 듣지 않았다 해도 소설을 다 읽은 후에 역자 후기를 통해 앞에 나왔던 내용들을 복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기에 언급된 내용이 소설에 담긴 의미의 전부는 아닐 것이고 내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간 내용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읽어보면 더 많이 알 수 있을까. 영화는 보지 못해서 원작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원작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을 줄지는 모르겠다. 

고전을 읽어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추천. 
굳이 고전에 흥미가 없다면 필독할 필요까지는..


덧. 영화 개봉도 안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그리스인 조르바'는 왜 언젠가부터 갑자기 읽는 사람들이 늘어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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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춘한삼 2013. 6. 16. 19:34
나이든 기술자에 대한 소설이나 에세이, 회고록을 연상케하는 제목의 '오래된 연장통'은 그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항상 인기 있는 분야인 심리학 중에서도 최근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진화심리학을 소개하는 책이다. 진화심리학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그건 니가 원시인이라 그래'가 아닐까. 혹은 '니가 진화가 덜되서 그래' 일거다. 하지만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위해선 역시 책을 읽어봐야 한다. 

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카테고리 인문 > 심리학
지은이 전중환 (사이언스북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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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에서 '심리학' 앞에 굳이 '진화'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현재의 우리는 원시인들이 진화한 결과이므로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출현한지는 300만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지는 20만년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한 것은 대략 기원전 6000년 정도니 농경생활을 통해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직 만년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의 산업화된 사회는 20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농사를 짓기 이전의 수렵/채집 생활에 맞게 진화해온 인류가 농경사회나 산업사회에 적합하게 다시 진화할 시간적 여유는 거의 없었다. 즉, 현재의 우리는 수렵/채집 생활에 적합하도록 진화된 존재이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 오래된 연장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인류를 '오래된 연장통'이라고 저자는 표현했다. 이점은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모든 것을 지배할텐데 그 중 심리적인 면을 다루는 것이 '진화심리학'이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진화'라는 도구를 통해 해석하는데 인간의 마음에 대한 거의 모든 부분에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화심리학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돕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마음은 경제적 이득을 최대화하게끔 설계되지도, 이성이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역사 속에서 실현하게끔 설계되지도 않았다. 인간의 마음은 인류의 진화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맞닥뜨려야 했던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된 수많은 심리 기제들의 집합이다. 마음이 설계된 목적을 연구하는 진화심리학은 심리학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이론 틀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미처 몰랐던 사실들에 대한 예측들을 풍부히 생산하여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이끌어 준다. 심리학뿐만 아니라 철학, 예술, 종교, 미학, 경영, 법학, 경제, 의학 등등 인간의 모든 지식 체계들이 인간 본성에 대한 저마다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감안하면, 마음에 대한 진화적 탐구는 인간이 이룩한 학문 전체를 통합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오래된 연장통'은 진화심리학에 대한 기본입문서이다. 그러면서도 딱딱한 내용과 문체로 독자를 괴롭히는 책과 정반대인 대중서이다. 원래 다른 곳에 연재하던 글을 모아서 책으로 펴내서인지 문체나 내용 모두 비전문가들에게 흥미를 줄 수 있도록 쉽고 깔끔하게 쓰여있다. 각 챕터의 분량이 거의 같은 것도 연재본을 모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진화가 덜되서 그렇다는 견해로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방식은 신기할 정도로 여러가지 현상을 잘 설명한다. 뭔가 심오하고 이상한 인간의 행동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우리가 무심코 범하는 행동이나 취향들도 포함된다. 그 중 한 예로 사람들이 왜 2층 카페의 창가자리에 앉는 것을 선호하는지를 진화심리학이 설명한 것을 보자. 

조경 연구자 제이 애플턴의 '조망과 피신'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바깥을 내다 볼 수 있는 곳을 선호하게끔 진화했다. 장애물을 가리지 않는 열린 시야는 물이나 음식물 같은 자원을 찾거나 포식자나 악당이 다가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데 유리하다. 눈이 달려 있지 않은 머리 위나 등 뒤를 가려주는 피난처는 나를 포식자나 악당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산등성이에 난 동굴,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 동화 속 공주가 사는 성채,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된 2층 카페 등은 모두 조망과 피신을 동시에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풍수지리설에서 배산임수, 즉 뒤로 산이나 언덕을 등지고 앞에 강이나 개울을 바라보는 집을 높게 쳐 주는 것에도 심오한 진화적 근거가 깔려 있는 셈이다! 


머나먼 옛날, 사바나에 살던 인류가 선호했던, 넓은 시야를 확보하면서도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공간을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도 무심결에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외도 우리가 겪는 많은 흥미로운, 하지만 사소한, 행동과 심리에 대해 진화심리학적 설명이 실려있다. 새로운 학문을 소개하는 대중서로서 말 그대로 일반 '대중'들에게 잘 다가갈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진화론을 믿는다면 추천. 
심리학에 관심이 있지만 진화심리학에 대해서는 모른다면 강
추.
진화심리학에 대해 이미 잘 안다면 굳이 또 읽을 필요는.. 


 
by 청춘한삼 2013. 6. 8. 14:25
내가 중학생 2학년이었을 때 (내 나이 절반이던 시절) 나는 '반지의 제왕'을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판타지소설이란 것을 처음 접했다. 신문에 난 광고를 통해 '드래곤라자'라는 것이 PC통신에서 큰 인기를 끌고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어쩌다보니 친구들과 '드래곤라자'를 열심히 빌려보게 되었다. 12권으로 된 시리즈가 한번에 출간된 것은 아니고 며칠 간격으로 나왔었는데 다음권을 기다리는 며칠이 정말 길게 느껴졌었다. 

'드래곤라자'를 다 읽은 후 관심은 자연스레 다른 판타지 소설로 이어졌다.당시에 우리나라에 출간되어 있던 판타지 소설 중 가장 명작이라는 작품이 '반지전쟁'. '반지의 제왕'도 아니고 무려 '반지전쟁'이었다. 현재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에서 6권으로 번역되었지만 당시 내가 처음 접했던 판본은 3권으로 되어 있었고 글씨 크기도 보통 책보다 작았다. 그런데다 각권의 두께도 일정하지 않고 1권 > 2권 > 3권 이렇게 얇아졌었다. 기껏해야 엘프, 드래곤, 인간, 오크 정도만 나오던 다른 판타지 소설에 비해 종족이나 등장하는 나라도 좀 더 다양하고. 다시 말하면 1권의 진입장벽이 높다는 것. 처음에는 딱딱한 문체와 헷갈리는 이름들 덕에 힘겹게 3권까지 읽어나갔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 학교 도서관에서 5권으로 된 '반지전쟁'을 또 발견했다. 번역이 바뀐건지는 모르겠지만 글자 크기가 커지고 책이 상대적으로 얇아져서 가독성이 좋아졌다는 것만 해도 다시 읽어보기에는 충분한 동기가 되었었다. 

나중에 영화로 반지의 제왕이 나올 때 '반지전쟁'과 '반지의 제왕'이 동일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던건 당연한거지만 원제가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반지전쟁을 접했을 때 제목이 '반지전쟁'이니 원제는 The war of the ring이나 The ring war겠지..? 라던 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어서 '제목을 왜 이렇게 지은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The load of the rings'라는 원제가 기억에 강하게 남았었다. 

반지의 제왕 스케치북 - 스케치북에 그린 가운데땅 이야기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엘런 리 (씨앗을뿌리는사람,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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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반지의 제왕' 책을 두 번 읽고, 3부작으로 나온 영화도 극장에서 다보았다. 원작이 책인 영화들이 흔히 듣는 '책이 더 낫네'라는 말을 반지의 제왕 영화도 들었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책보다 영화가 더 마음에 든다. 책에서 설명이 많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이미지로 잡히지 않던 호빗이나 엔트, 리벤델, 나즈굴, 모리아, 골룸, 사우론 등등 많은 등장인물, 장소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건 영화를 볼 때도 느꼈지만 작년 반지의 제왕 전자책을 사서 읽으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겐 책보다 영화가 더 맞다고. 

그런 '반지의 제왕' 영화를 제작할 때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영화의 거의 모든 등장인물과 배경을 창조해낸 엘런 리의 스케치가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책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은 '반지의 제왕' 스토리 순서에 따라 스케치가 실려있다. 완벽하게 채색까지 끝난 일러스트는 아니고 위의 표지에 나오는 것과 같은 단일색으로 그려진 펜화이다. 스케치와 함께 엘런 리가 해당 작업을 할 때의 에피소드나 당시 그리고 현재의 자신의 감정을 적어놓은 부분도 판타지 영화의 제작 과정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영화에서는 빠진 봄바딜과 금딸기가 등장하는 부분도 원래는 제작에 포함되었었는지 해당 부분의 스케치도 책에 실려있다. 중세 유럽 풍의 배경이 많기는 하지만 소설 자체가 서양에서 나온 것이고, 엘런 리도 그쪽 사람이다보니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위에 적었듯이 책의 순서가 책과 영화의 순서와 같기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며 자연스럽게 소설과 영화의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블루레이도 없이 미리 사둔 블루레이를 조만간 볼 수 있길 바라면서, 그 때까진 이 책으로 중간계를 맛봐야겠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정말 좋아한다면 강추. 
판타지 영화, 게임, 만화 제작이나 일러스트 등에 관심있다면 추천. 

by 청춘한삼 2013. 6. 1.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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