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라는 이름을 들으면 떠오랐던 이미지는 우선 암살, 다음은 69년 쏘아올린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그 다음에야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이 이미지들로부터 케네디는 젊고, 과학기술에 투자했으며 평화를 달성한 대통령으로서 공항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JFK) 유능하고 존경받는, 하지만 비운의 대통령이라는 느낌을 주는 역사 속 인물이었다. 당시 냉전 상황에 대해 전혀 이해가 안되있었기 때문에 이미지들 중 뒤의 두가지가 연결되있다는(물론 암살의 배후는 아직 알 수 없다) 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던 케네디의 기록물을 토대로 한 책이 나왔다. 기록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이 책은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기록물에 기초하여 쿠바의 미사일 기지가 발견되고 어느 정도 위기가 해소될 때까지 13일 간에 발생한 사건과 관련 회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존 F. 케네디의 13일 - 쿠바 미사일 위기, 거짓말, 그리고 녹음테이프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지은이 셀던 M. 스턴 (모던타임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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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세계사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면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 잘 알고 있을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나만 해도 쿠바에 미사일이 발견됐고 케네디가 해상 봉쇄를 비롯해 소련에 경고를 했고 소련이 그 것을 받아들여 무기를 실어나르던 배들의 목적지를 바꿈으로써 전쟁을 막았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이 정도이긴 하지만 이 두 줄 남짓의 서사 내부에서 벌어지던 긴박한 상황의 디테일을 파악하고 이해하기는 무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케네디가 직접 회의를 녹음한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당시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방대한 양의 녹음 테이프 내용을 정리하고 해설을 달아준 저자에 의해 이 책도 나올 수 있었다.

쿠바 미사일 사태는 1962년 10월 14일, U2 정찰기에 의해 쿠바에서 소련의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소련이 아닌 쿠바의 미사일 기지에서 핵미사일이 발사된다면 미국 본토는 시애틀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핵공격의 사정거리에 들어오게 되는, 미국에게는 그야 말로 목에 칼을 대고 살아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0월 16일부터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엑스콤) 회의가 대통령 주재로 계속해서 열리게 된다. 이 때의 엑스콤 회의들을 녹취한 내용을 바탕으로 핵무기를 이용한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한, 혹은 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쿠바의 미사일 위기는 어느 정도 미국이 자초한 결과이다. 미국은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직접적인 군사작전을 포함한 시도들을 해왔다. 쿠바나 소련 입장에서는 쿠바 침공 억지를 위해 미사일 배치를 생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닌 상황이었다. 미사일 기지가 발견되기 직전만 해도 쿠바 전복을 위한 몽구스 작전에 대한 회의가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기도 하다. 미사일 위기가 해소된 이후에도 쿠바 정권 전복 작전은 계속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평화의 전도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 내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대중에게 케네디는 매파였고 냉전 이데올로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 임기 동안 '완고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냉전의 전사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 미사일 위기가 당시 최강대국 간의 핵전쟁을 통해 지구적 종말을 불러오지 않은 이유는, 케네디 대통령의 타협적이고 비군사적인 외교적 노력 때문이었다. 군사적 행동을 주장하는 엑스콤 회의 참가자, 특히 군인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공멸이 아닌 공존을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은 어느 한 순간 머리 속에서 떠오른 발상이 아니다. 젊은 시절 해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느꼈던 전쟁의 참혹함에서 비롯된 전쟁에 대한 혐오증이 세월을 지나서 자신에 선택에 의해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막기 위한 노력으로 표출된 것이다. 비록 불완전한 인간이라 갈등하기도 하고 망설이기도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목적을 위해 주변을 설득하고 헤쳐나가는 모습을 통해 지도자가 갖춰야 할 리더십과 자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국가 최고 정책은 대통령의 가슴과 머리에서 나오거나, 적어도 대통령의 인격에 의해 담금질된다. 대통령의 확신과 열정은 가족과 학교와 젊은 시절의 경험에서 우러난 생각과 거의 항상 관련이 있다. p. 58

이 책의 단점이라면 곳곳에 지뢰처럼 숨어있는 오타다. 비단 역사를 다루는 책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타가 있으면 책의 완성도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역사책이라면 그점이 좀 더 아프게 다가온다. 이런 괜찮은 내용의 책을 내놓고 사소한 오타 때문에 아쉬움을 느끼게 하다니..교정은 어차피 돈주고 외부에 맡기는 걸로 알고 있는데 돈을 아껴보려고 너무 싼 곳에 맡겼거나 출판사 직원들이 직접 했다가 이렇게 됐나보다. 아래는 오타들의 몇 개 예시이다. 찾고도 귀찮아서 표시안해둔 것도 있다.

새로운 핵 시대의 새벽에 새로운 미국 국제주의의가 내세운 이상주의적 말들은 정치경제적 지배를 향한 미국의 욕구를 확실하게 숨겼다. p.38
케네가가 "어쩄든 저도 그렇다고 봅니다"라고 답한다. p.113
흐루쇼프로가 서반구에서 미사일 군비를 크게 확대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p.125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상황을 대입해 볼 수 밖에 없다. 전쟁의 가능성이 크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남아는 있고(가능성을 크게 보는 양극단의 돌+아이들도 있지만) 평화를 깨기 위한 방아쇠를 당길 기회는 최근 몇 년 간 꾸준히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결정적 상황이 벌어졌을 떄 우리나라의 소위 지도층에서도 평화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내막도 모른 채 전쟁의 포화 속으로 이끌려 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할까? 개인적으로는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다.

슈퍼 히어로 대신 현재의 지구가 존재할 수 있도록 노력한 사람과 사건에 대해 알고 싶다면 강추.
어떤 사람이나 사건의 뒷 이야기들에 흥미가 있다면 추천.
불완전한 인간이 주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쟁취하는 스토리를 좋아한다면 추천.

덧. 책을 소개하는 기사나 인터넷 서점들의 소개글을 보면 녹취 테이프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로 케네디가 1961년 피그스만 침공 실패 이후 말을 바꾼 자문위원들에게 화가 나서 이후부터 녹취를 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정작 책을 보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나와있다. 앞에 말한 이유일 수도 있지만 좀 더 가능성 있는 것은 퇴임 후 회고록 작성을 위함일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본인은 물론이고 녹음 장치를 설치한 사람들도 그 이유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든 기사나 소개글들이 하나같이 피그스만 침공 실패를 이유로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도 책의 내용을 읽어보지는 않은 듯 하다. 아마 출판사에서 좀 더 극적으로 보이는 첫번째 이유를 대면서 책 소개글을 기자와 서점들에 배포하고 이를 토대로 기사가 작성된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하지만 녹음 장치가 설치된 이유와 마찬가지로 진실은 알 수 없다.
by 청춘한삼 2014. 2. 26.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