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동안 드래곤 라자를 오랜만에 정주행했다. 처음 읽었던 때가 중2였으니 나이가 두 배가 되어서 읽은 건데 나이가 더 들어서인지, 어렴풋한 기억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던 기억의 틈새를 메워서인지, 아니면 처음 읽을 때 워낙 급하게 읽어서 제대로 뭔가를 느낄 시간 조차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 어떤 것이 주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판타지 소설은 아예 장르문학이라고 지칭되면서 주류(?) 혹은 일반 문학과 따로 분류되는데 드래곤 라자는 이야기의 배경이 판타지 세계라는 것 외에는 주제 의식이라든가 내용의 구성, 전개 능력처럼 더 중요한 것은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자 자국은 드래곤 라자가 나온지 1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해 나온 작품이다. 이 점만 가지고도 진작에 읽어보았어야 하는 작품인데 출간된지 5년이 넘어서 이제야 읽어보게 되었다. 혹시 출간된지 5년이 넘은 작품의 내용을 언급하는 것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래를 보지 말고 당장 창을 닫으시오. 

그림자 자국(양장)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이영도 (황금가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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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에서는 '드래곤 라자'의 이야기에서 천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10주년 기념으로 나온 소설이라 '드래곤 라자'의 팬들을 배려해서인지, 바이서스 제2의 건국의 시기에 활약했던 '드래곤 라자' 주인공들이 영웅으로 남을 수 밖에 없어서인지(아마 둘 다 겠지) 곳곳에서 '드래곤 라자' 출연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엘프인 이루릴은 이번 작품에서도 거의 주인공 급으로 출연하며 대부분의 드래곤보다도 나이가 많은, 최고령 엘프녀 배역을 소화한다. 또한 마법사 아프나이델은 이번 작품에서 핵심이 되는 소재를 제공함으로써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번 작품의 특징을 들자면, 이영도의 다른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면을 조금씩 '그림자 자국'에서 보여준다는 점이다.
우선 이야기의 핵심적인 인물인 예언자의 등장. '드래곤 라자'에서도 자이펀식 카드점을 보는 예언자(?)가 등장했을 때도 그랬지만 퓨처워커에서 나왔던 '미'와 주변 인물을 통해 드러냈던 예언의 위험성을 다시 한 번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람들은 예언자가 예언을 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자신이 바라던 예언이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래를 바꾸려 한다는 점을 통해 작품 내내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면서 작품을 이끌어 간다. 주인공들 외에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왕밖에 없지 않나 싶을 정도로. 정말로 이런 예언가가 있어서 모든 것을 알고 그것을 떠벌리고 다닐 때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해 가질 태도는 아마 다음 내용과 같을 것이다. 

왕비는 느긋하게 도착할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소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예언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여유 있게 보이려면 책이라도 한 권 붙잡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곤 가까운 곳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의자에 앉았습니다.그것은 고전 추리 소설이었습니다.
(...) 따라서 왕비는 탐정에 대한 살해 시도가 묘사되기 시작했을 때 완전히 수긍하며 몰입했습니다. 소년이 어떻게 당하게 될지 궁금해하던 왕비는 헛기침 소리를 들었어요.
(...) 예언자는 왕비를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옮겼습니다. 그의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은 책을 향했죠. 왕비가 의아하여 쳐다보았을 때 예언자가 책을 보며 말했습니다.
"범인은 영주의 아들입니다."
 (...) 왕비는 침소로 돌아가 책이나 마저 읽다가 자기로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책으로 손을 뻗던 왕비는 그 손을 멈췄습니다. 그녀는 당혹감을 느끼며 책표지를 노려보았지요. 그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많이 식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범인은 영주의 아들입니다.'
문득 왕비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습니다.

또 하나를 들자면, 이루릴의 역할이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균형을 잡는 신들의 역할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드래곤을 보살피는 듯 하지만 이전에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드래곤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드래곤들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선 오랜 친구인 드래곤 레이디와 맞서 싸울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드래곤 라자'의 이그누스 드래곤이 그러했듯(그러하다고 언급되었던 듯) 완전히 균형을 잡는 것은 어느 하나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황희 정승처럼 니말도 옳다, 니말도 옳다 식의 좋은게 좋은거라는 자세가 아니라 전체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단수의 존재가 아닌 인간보다는 엘프나 드래곤에게 그 역할을 맡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비인간적인 캐릭터를 이용하더라도 캐릭터가 너무 작위적이거나 어설픈 구성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판타지 소설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드래곤 라자'에서 이루릴과 인간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얼마나 많은 통찰을 선보였던가

마지막으로는 시간에 대한 관심 또한 '퓨처 워커'에서 드러냈던 핵심 주제 중 하나였다. 물론 그림자 지우개를 통해 발생한 수없이 많은 시간의 변화와 그로 인한 혼돈은 '퓨처 워커'에서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자신의 현재로 대신하려던 악역 때문에 발생했던 혼돈과 다르기는 하지만.

내가 '눈물을 마시는 새'나 '피를 마시는 새'는 읽어보지 않아서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그 작품들에 관련된 요인도 있을거라 생각한다. 물론 이 작품이 '드래곤 라자'의 후속편이기 때문에 '드래곤 라자', '퓨처 워커'의 내용과 그 안에 들어있던 생각을 더 많이 따왔는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작가들이 그러하듯 이영도도 평생을 두고 추구할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종이책과 가격이 큰 차이가 안나서 고민하다가 전자책으로 사서 읽었는데 멋진 표지(다 읽고 나서 표지를 다시 보니 왜 표지의 주인공이 '그' 드래곤인지 알겠더라)에 한 권 밖에 안된다는 걸 생각하면 종이책으로 살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고 다시 볼 것 같은데 아쉽네.

드래곤 라자를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직 못 읽어본 모든 사람에게 강추.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을 좋아한다면 추천.
판타지 소설은 유치하기만 하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추천.


덧. 뱀파이어도 천년은 살지 못하는 것인지 결국 타이번은 결국 출연하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도 펫시를 가진 뒤에는 늙어 죽어버린건가.  

by 청춘한삼 2014. 2. 10. 2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