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를 통해 고대 그리스인과 신들에 대해 알아 봤으니 이제는 현대 그리스를 돌아본 여행기를. 뜬금없다 싶어서 꼭 지금 사봐야 할까..하는 생각에 구입을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제대로 읽게 된 박경철의 첫번째 여행기, 문명의 배꼽 그리스. 완결이 되면 볼까도 했지만 한두권 나오고 마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언제 완결이 될지도 까마득하다보니 결국은..

이전에 한번 저자에게 그리스 여행에 대해 직접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ppt까지 준비해와서 표지를 띄워놓았던 시골의사는 관객들 중에 학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며 즉석에서 주제를 바꾸어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부터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 어린 시절의 심리, 이를 통한 바람직한 교육에 대해 강연을 했었다. 어찌보면 그 때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것이 다행으로 생각된다. 여행기는 책을 통해 대강의 내용을 알 수 있지만 당시 들었던 저자의 경험은 그 기회가 아니면 들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배꼽, 그리스 (박경철그리스기행1)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박경철 (리더스북,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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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과 같은 전작들에서 보여준 인간적이면서도 맛깔나는 시골의사의 문체와 더불어 여타 여행기와의 차별성은 '니코스 카잔차키스'다. 책의 서문에서부터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이십대의 청년이 가슴에 새긴 꿈을 나이 오십을 앞두고 실현한 긴 여행의 기록'이다. 이십대의 청년의 가슴에 꿈을 새기게 만든 인물이 바로 니코스 카찬차키스였다. 서문을 통해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의과대학을 다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이란 무엇인지, 육신을 넘어 영혼에까지 생기를 불어넣는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아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가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조화를 이루며 쌓아 올린 문명과 역사의 참모습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새 인류가 오랜 역사를 통해 스스로에게 던진 그 오래된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이 어떠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온갖 책들을 전전하며 가슴앓이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단골 책방의 서가를 둘러보던 그 청년은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라는 책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이름도 낯선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 그리스 작가의 책을 산 청년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단숨에 읽어버립니다. 작은 불씨가 큰 산을 태우듯, 책을 읽어가면서 그의 가슴에는 점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불이 일었습니다. 마침내 그 뜨거운 불길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혼자 떠나 혼자 떠도는 여행이었지만 저자는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 항상 그의 옆에는 카잔차키스가 함께하며 때로는 조언을, 때로는 설명을. 카잔차키스는 옆에 있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친구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카잔차키스의 무덤에서 제를 올리던 저자에게 관심을 보이던 택시기사는 카잔차키스가 그의 영웅이라는 저자의 말에 자신의 친구인 카잔차키스의 또다른 친구과 아낌없이 우정을 쌓는다.

그리스인들에게 우정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같이 사랑하고, 내가 살아가는 곳에 같이 살아가고, 내가 아끼는 것을 같이 아끼는 사람. 그것이 친구이고, 친구에게는 모든 선의를 베풀어야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인들의 명예의 한 축을 담당하는 '우정'이란 말의 의미다. 이 우정은 곧 명예고, 거기에 용맹을 더하면 탁월함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명예를 누구보다 드높인 사람들, 그들은 '영웅'이라 부른다.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나라, 다른 사회를 접하게 되면 어느 것 하나 정도는 부럽다는 감정을 가지곤 하게 된다. (물론 예외는 있다) 저자의 경험을 통해 느낀 그리스에 대해 부러운 것은 바로 이런 점이다. 처음보는 타인과 공감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을 믿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얼마전 우리나라의 사적 신뢰지수가 OECD에서 최하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은 타인을 신뢰하십니까' 이런 문항에 대한 답을 통해 신뢰도를 조사하는건데 신뢰한다는 응답이 10명 중 3명이 안됐던걸로 기억한다. (정부 공적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말할 것도 없다) 분명 그리스도 경제 문제도 있고 하니 최하위권일텐데. 입장을 바꿔서 우리도 그리스인 택시기사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행동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아마 말조차 걸지 않거나 공공장소에서 이상한 행동을 한다며 신고를 하지 않아도 다행은 아닐까.

글 이 옆으로 조금 새기는 했지만 박경철이 경험한 그리스도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경제 상황 때문에 불법체류 중인 외국인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태도를 가진 극우파들도 흔히 볼 수 있는 듯 하고, 과거에 영광을 누렸던 도시들이 유적조차 제대로 관리되거나 남아있지 못한 것을 보면 한탄이 나오기도 한다.

크레타 섬에서 카잔차키스를 매개로 나누었던 우정을 제외하면 아직은 코린토스나 스파르타 같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만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몇 개 도시와 유적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스에 대한 많은 것을 보여준다. 나도 저자처럼 가슴에 그리스와 카잔차키스, 시골의사를 품고 함께 다음 여행지로 떠나길 기다려본다. 신들이 잠들어 있는 그곳으로.
by 청춘한삼 2014. 6. 6. 2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