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을 보면 '미국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사회에서 한평생 살아오긴 했지만, 미국과는 다르게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되는 유럽의 유구한 역사와 독일, 프랑스, 영국, 북유럽 국가 등이 가진 부유하고 살기 좋은 나라의 이미지는 나에게 있어 유럽에 대한 선망과 기대감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들의 역사와 생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나름대로의 부끄러운점과 고충, 고민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지금은 재정위기 때문에 유럽연합(EU)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세계대전이라 이름 붙인 전쟁을 두번이나 치루고도 전 유럽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그들의 시도(혹은 실험)는 충분히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수십년 간 서구화를 급격히 진행시켜 왔고, 근현대 들어 좋지 못한 사이를 유지해 온 이웃 나라들을 가진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유럽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단 그런 조건이 없더라도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교훈을 얻는 것은 언제나 필요하기도 하고.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 서양사
지은이 (위즈덤하우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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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워온 세계사는 대부분 유럽에 무게중심을 두고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다른 대륙의 역사는 유럽사와 관련이 있을 때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세계사라고 하는 것이 유럽 중심으로 연구되었고 전파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주류 역사학의 시각만을 따르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왜곡되어 있는 역사적 시각을 가지게 되는 위험이 있다.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라는 제목은 그런 면에서 매력적이다. '삐딱한' 것이 '잘못된, 틀린'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시각을 가진' 정도로 생각하면 딱 맞을 것 같다. 

그러면 이 책은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가 궁금할 것이다. (아닌가?) 책에서는 유럽 문명이 어떻게
근대정신을 가지고 발전시켜 나가는지를 살펴본다. 또 하나의 의문이 될, 저자가 말하는 '근대정신'은 다음과 같다. 

르네상스가 근대를 향한 기지개라고 봤을 때, 근대성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근대는 물론 시대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동시에 문명의 특정 상태을 의미하기도 하며 논의의 성격에 따라서는 후자가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른 단지 경제적인 영역이나 제도,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을 넘어서는 문명의 의식수준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근대의 핵심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다양한 어휘로 설명·정의할 수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기독교 도그마의 붕괴와 인본주의의 성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정 가치가 사회를 지배하고 이에 반항하는 자에 징벌을 내릴 때 우리는 그 사회가 도그마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중세 유럽에 있어서 도그마는 기독교였다. (p. 187)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 특히 중세는 인간보다 신이 우선시되는 시기였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이라는 '광기'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시기이기도 했다. 저자는 관용과 사랑이 기독교 내에서만 통했던 시기라고 말했지만, 십자군 원정이나 마녀사냥을 보면 사실상 기독교 내에도 관용과 사랑은 제대로 통하지 않았었다. 이런 시기를 탈피해 신 대신 인간을 중시하는 인본주의가 탄생하고 전파되는 것은 눌렸던 스프링이 결국 더 높이 튕겨오르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위에서 저자는 '기독교 도그마의 붕괴와 인본주의의 성립'을 중세 유럽을 벗어나는 핵심요소라고 말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것이 근대의 핵심요소가 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 도그마를 대신한 반공 도그마의 극복과 인본주의의 성립일까. 혹은 다른 요소일까. 


이제 우리는 어두운 과거인 중세를 넘어 근대정신을 달성한 이상적인 사회를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 또한 던질 수 있다. 하지만, 근대정신과 이상적 사회에 대한 견해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 범죄, 학살, 착취, 수탈, 부패는 이어지고 거짓과 위선을 통한 지배와 통제는 더욱 교묘한 형태로 자행되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말해주는 바는 하나다. 인류는 여전히 탐욕과 증오, 광신의 포로로 살고 있다. 새로운 맹신이 과거의 맹신을 대체하고 새로운 미움이 예전의 미움을 대신하며, 소유에 대한 욕망은 무한대로 확장되어 타인의 땀과 피를 요구하고 있다. 중세는 아직 종결되지 않았고 근대의 이상도 달성되지 않았다. (p. 434)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단일한 주제와 짜임새이다. 단순히 시대별로 어떤 전쟁이 일어났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정신의 달성'이라는 주제를 견지하며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에 얇지 않은 두께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이야기에는 짜임새가 있다. 

또한 유럽사 외에도 챕터가 끝날 때마다 저자가 유럽, 캐나다에 살면서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 나라들과 우리나라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는 점도 마음에 드는 면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해되지 않았던 서구사회의 빈곤층, 범죄자들의 존재가 서구사회의 개인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라고 할까. 

전체적으로는 '근간'으로 되어 있는 다른 대륙의 시리즈를 기대하게 하는 책이다. 
 

인류의 이성을 통한 근대성의 발전 과정을 알고 싶다면 강추.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세계사(유럽)를 보고 싶다면 강추. 
소위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차이, 선진국의 명암에 대해 알고 싶다면 추천. 


덧. 책의 마지막에 성당기사단(템플기사단)과 장미십자회, 프리메이슨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내용 중에 팩트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추측, 추정하는 내용이 많다는 점이 아쉬웠다. 물론 책의 말미에 흥미를 끌 수 있는 내용이 들어가는 것은 나쁘지 않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단체들일 수도 있지만 결국 음모론과 추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점에서 본문에서 잘 쌓아온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물론 이건 개인 취향의 문제. 
by 청춘한삼 2013. 5. 1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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