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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이하 유럽산책)' 이후 두번째 읽는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다. 책에 대한 전반적인 평이나 유명세가 '유럽산책'보다 좀 더 좋은 편인 듯 해서 벼르고 있다 보게되었다. 이전에 Gene이 쓴 글에 나온 것처럼, 그리고 아래 책 소개에 나와있듯이 이번에는 빌 브라이슨이 애팔래치아 산맥 트래일 종주를 시작했다.
 

'유럽산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을 떠나는 거창한 목적은 없었다. 물론 여러 구실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시작은 다음에 나오는 것처럼 단지 집 근처에 트레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뉴햄프셔 주의 작은 마을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돼 우연히 마을 끝에서 숲으로 사라져 가는 길을 발견했다.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었다. 그 유명한 '애팔래치아 트레일'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 트레일은 장거리 종주 등반의 원조로 불린다. 미국의 동부 해안을 따라 고요히 솟아 있으면서 은근히 사람의 발길을 부르는 애팔래치아 산맥 위로 굽이굽이 3천360킬로미터나 흐르는 길이다.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까지 14개 주를 관통하면서 이름만 들어도 맘에 설레는 블루리지, 스모키, 컴벌랜드, 그린 마운튼, 화이트 마운튼을 지나간다.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튼'이라든지 '셰넌도어 국립공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주의자 존 뮤어가 표현한 대로 빵 한 덩어리와 차 한 봉지를 낡은 배낭에 넣고서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달려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내가 막 정착한 뉴잉글랜드의 조그만 마을에 뜻하지 않게도 이 트레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이 길을 따라 조지아 주까지 2천880킬로미터를 걸어서 가거나, 또는 반대방향을 택해 거칠고 돌이 많은 화이트 마운튼을 따라 720킬로미터를 걸어서 몇 사람 경험해보지 못한 전설적인 마운트 캐터딘 산을 밟아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뜨거워졌다. '근사하지 않은가. 당장 바로 하자'는 충동이 불끈 솟았다. p.13-14

이렇게 시작된 트레일 종주에는 '유럽산책'에서도 저자의 추억 속에 등장했던 친구인 카츠도 함께 한다. 십수년 만에 다시 만나서 처음엔 어색하고 서로 맞지 않지만 점점 서로에 대한 믿음과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카츠 외에도 메리 앨런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만나 고생을 하기도 하고 서로 도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내 앞에 펼쳐진 새로운 길 앞에서 그 여행이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여행의 한가지 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잡학다식한 빌 브라이슨답게 이 책에서도 자신의 박식함, 혹은 박식해보이는 능력을 뽐낸다. 물론 소재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이다. 트레일의 위험요소인 흑곰이나 그 외에 트레일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동물들, 트레일의 역사와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 생각과 잘 버무려 풀어낸다. 또한 트레일 관리를 맡은 공원관리국의 공원파괴 행위라든가 하는, 트레일과 트레일하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행정, 관리 부실 등에 대해서도 제 목소리를 낸다. 개발구역도 아닌 자연보호 공원에서 자연파괴가, 그것도 공원 환경을 보호해야 할 공원관리국에 의해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데 내용을 조금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도롱뇽보다 더 다양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종이 '민물 홍합'이다. 세계 전체의 3분의 1인 300종의 홍합이 여기에 서식한다. 스모키 홍합은 자줏빛 사마귀 등, 빛나는 돼지 발톱, 원숭이 얼굴 진주 홍합과 같이 괴이한 이름들로 불린다. 불행히도 그들에 대한 관심은 이것으로 끝이라는 점, 심지어 자연주의자들로부터도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홍합은 놀라운 속도로 사라져갔다. 스모키 홍합종의 거의 절반이 멸종 위기에 있으며, 12종은 이미 소멸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자연보호 공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놀랄 만한 일이어야 한다. 홍합들이 알아서 지나가는 차에 돌진해 바퀴 밑에 깔리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모키는 대부분의 홍합을 잃어버리는 과정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실제 국립공원관리국은 뭔가를 멸종시키는 게 전통인 듯 싶다. 브라이스캐니언 국립공원은 아마 가장 흥미로운 사례일 것이다. 1923년에 창설된 이 공원은 자신이 관리를 시작한 지 반세기도 안되어 7종의 포유류 - 흰꼬리 산토끼, 들개, 영양, 날라다닐 수 있는 다람쥐, 비버, 붉은 여우, 점박이 스컹크-가 멸종되었다. 이런 동물들이 브라이스캐니언에서 공원관리국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기 전 수백만 년을 생존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으로 놀라운 업적이다. 모두 함께 42종의 포유류가 20세기에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멸종되었다. p.149

물론 트레일을 걷는 동안 이런 설명만 늘어놓지는 않는다. 빌 브라이슨답게 책 곳곳에 유머가 도사리고 있고, 여행기답게 트레일을 걷는 동안 자신 앞에 펼쳐진 놀라운 자연을 보고 감탄하며 즐기기도 하고, 힘들어 불평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힘들어하는 시간이 길었던 브라이슨과 카츠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을 느끼고, 나중에는 오히려 도시에서 더 낯설고 어색함을 느끼기도 한다.

죽을 고비까지 넘겨가며 힘들게, 그리고 의외로 열심히 트레일을 걸었던 저자와 카츠의 모습을 보다보면 도시를 떠나고 싶어하는 현대의 도시인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유행이 된 캠핑은 이런 욕망을 가장 현실적으로 해소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주말에 잠시 교외나 캠핑장으로 캠핑을 가는 심리에는 언제든 다시 익숙한 도시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생각이 깔려있다. 하지만 브라이슨과 카츠는 훨씬 더 긴 시간을, 산속에서의 캠핑이 그들의 새로운 일상이 될 정도를, 산속에서 보냈다. 비록 완주를 하지도, 모든 경로를 걸어간 것도 아니지만 진짜 도전을 한 것이다. '유럽산책'에서도 그랬지만 브라이슨의 여행기에서는 언제나 '도전'이 있다. 카츠와 함께 유럽여행을 한지 20년 만에 혼자 유럽 곳곳을 걸으며 여행했었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카츠와 함께 3천 킬로미터가 넘는 트레일에 나선다. 그것도 뚱뚱한 중년이 되어서.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애팔래치아 산맥이었다.(물론 '나를 부르는 숲'이라는 제목은 국내 출판사에서 지은 것이다만) 브라이슨 외에도 나를 비롯한 누구에게나 '나를 부르는 어딘가'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머리 속에 많이 떠올랐던 장소는 제주도 올레길이었다. 완전히 산 속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시숲의 길도 아니다. 산도 있고 바다도 있다. 자연 그대로 보존된 곳도 있지만 사람이 사는 지역도 지나간다. 브라이슨 표현에 따르면 '인간세계로부터 보호된 복도'가 아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세계도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곳이다. 언제쯤 가볼지 확실히 알수는 없지만 시간을 잘 정해서 내 앞에 놓인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 때까지 파괴되지 않고 잘 보존되길 바라고, 올레길을 가기 전엔 부산의 문탠로드나 이기대를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다.

트레킹을 좋아한다면 강추.
자연을 즐기는 여행을 좋아하고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추천.
빌 브라이슨의 다른 여행기를 재밌게 읽었다면 추천..하지만 '유럽산책'만큼의 개그와 말장난은 없는 듯.
뚱뚱한 중년 아저씨들의 도전과 모험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추천.

덧. 번역이 잘못된 것 같은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만든 사람 중 한명의 이름이 '매카이(p.50)'와 '매카이에(p.230~)' 둘로 혼용된다.
덧2. 이 책이 교양과학으로 분류된 건 아마 분류하는 사람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보고 같은 저자이니 읽어보지도 않고 같은 분류로 넣어버린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그래도 과학책은 아니지 않나.

by 청춘한삼 2013. 10. 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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