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나 역사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없는 사람도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는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전쟁의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십자군 전쟁은 기사도를 지닌 기사들이 종교적 신념에 의해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에서 구해내고, 성지를 이교도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200년간 수행된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런 숭고한 종교적 이유 외에도 경제적, 사회적 이유가 있었다는 내용도 역사책들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정도가 내가 어릴 때 세계역사책에서 읽어서 알고 있던 십자군 전쟁에 대한 내용의 대부분이다. 거기에 소년 십자군의 비극이나 사자왕, 살라딘의 존재 정도가 추가되는 것이 내 지식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종교적 이유만으로 200년이나 전쟁을 - 탄압이나 싸움 수준이 아니라 무려 전쟁을 - 치루는 것이 비종교인인 나로서는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고, 십자군이 항상 이교도만을 상대로 전쟁을 한 것은 아니었던 기억이라 종교적 이유 이면에 숨겨진 진짜 이유와 십자군 전쟁 자체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더해 나는 전쟁이라는건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광기를 가지지 않으면 수행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200년의 세월 동안 전쟁을 지속시킨, 십자군과 당시 유럽을 지배했던 광기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은 생각이 제일 컸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1 : 군중십자군과 은자피에르
카테고리 역사/문화 > 서양사
지은이 김태권 (비아북,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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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에 대한 책을 살펴보다가 알게 된 책 중 하나가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만화책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기성세대에 의해 흔히 생각되는 - 웃고 즐기기 위한 - 만화보다는 학습만화에 더 가깝다. 이전에 큰 인기를 얻었던 '먼나라 이웃나라'를 떠올리면 되려나.

이 책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부시를 비롯해 현재 사회를 패러디하고 가끔은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말장난을 하기도 한다. 그런 패러디나 말장난들로 자칫 책이 가볍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을 가볍게 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책의 메시지이다. 작가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통해 작품을 쓰게(?) 되었다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작가는 '반전'과 '평화'의 정신을 책을 통해 알리려 한다. 또한 다른 것에 대한 '포용'과 '공존'도 포함한다.
다음으로는 작가의 철저한 고증이다. 뭔가 대충 그린 듯한 그림들 속에는 철저한 고증을 통한 중세 유럽과 십자군의 모습이 살아있다. 그림만이 아니라 내용 또한 마찬가지다. 패러디로 인해 사건의 내용이 바뀌거나 할수도 있지만 최대한 팩트에 가까운 내용을 밝히기 위해 많은 자료들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 (물론 번역본으로) 물론 수많은 대비되는 기록들 중에 작가에 의해 선택된 자료들이긴 하지만 최종 판단은 독자의 몫이기도 하고, 작가가 참고한 자료들이 책 뒤에 나와있기 때문에 원한다면 직접 찾아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십자군 전쟁이 대부분 유럽의 기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편이거나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던 이슬람과 비잔틴 제국의 기록에 의한 자료들을 통해 십자군 전쟁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시리즈는 십자군 전쟁을 다루는 책이긴 하지만 시리즈의 1권은 로마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왜 로마가 전쟁을 계속하며 호전적인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쌓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로마의 뒤를 이어 십자군이 등장한 중세도 등장한다. 어떤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그 사회 모습에 대해 말하지 않기 어려운 것처럼 십자군이 등장한 중세의 유럽 사회상이 잘 설명된다. 책에 나타난 중세 유럽의 사회상을 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모든 것을 현재의 기준과 상식으로 생각하고 동일시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재판의 방식이라든가 전 유럽인이 가지고 있던 신앙에 대한 믿음과 같은 것은 오늘날의 - 혹은 현재 나의 - 기준으로는 비이성적, 비상식적이었다. 

1권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는 십자군은 1차 십자군에 포함되는 '군중 십자군'이다. 제대로 훈련된 기사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아니라 빈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군대와 이를 이끄는 은자 피에르의 험난한 원정이 펼쳐진다. 이를 통해 당시 시대를 지배한 광기는 '무지'와 '편견', 그리고 '부조리한 사회'에 의해 탄생하고 증폭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을 보면서 현재의 교육이 -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까지 포함해서 - 사람들을 무지와 편견으로부터 구출해주는데 얼마나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또한 수만명의 빈자들을 원정에 참여하게 만든 당시의 희망없는 사회가 다시 출현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사실 끝난지 50년이 조금 넘은 히틀러의 독일에 의한 전쟁은 - 본인들도 십자군을 칭하긴 했지만 - 희망없는 사회와 무지, 편견을 통해 진행된 전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 광기가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졌다. 과연 작가가 말하는 반전과 평화, 포용과 공존의 시대가 올 수 있을까. 그런 사회에 비교적 가까워보이던 북유럽도 최근에는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이 불안하다. 

책의 마지막에 있는 '고전 읽기'도 놓치기는 아깝다. 1권에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포함해 '루시퍼 이펙트'에서 나왔던 스탠포드의 감옥 실험,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실험 등을 통해 '폭력의 일상성'에 대해 논의한다. 이미 유명한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다. 들어본 적 없다면, 더더욱 필독이 요구된다. 

십자군 전쟁의 본모습에 대해 알고 싶다면 강추. 
전쟁의 본질에 대해 알고 싶다면 강추.
중세 유럽과 이슬람 사회에 대해 알고 싶다면 추천.  

 
by 청춘한삼 2013. 3. 1.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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