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한일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르자 여러 나라에서 승부조작 의혹을 제기하고 일부 국가에서는 승부조작을 기정사실화 하며 한국축구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폄하하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당연히 우리 국민들은 분노했었고 지금도 잊을만하면 한번씩 터져나오는 쓸데없는 주장들에 한번씩 화를 내곤 한다.

당연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승부조작'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은 매우 좋지 않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축구나 월드컵과 승부조작이라는 단어를 함께 연상하는 것이 비현실적이고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4강 진출을 승부조작과 연계했던 나라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기억을 잘 떠올려 보거나, 지금 열려있는 인터넷 브라우저 창을 닫기 전에 구글링을 통해 당시 어떤 나라들이 승부조작을 의심하고 의혹을 제기했는지 확인해보라. 그들 대부분은 자국의 축구가 승부조작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축구'와 '승부조작'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잘 엮여있는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한국 대표팀의 경기력을 인정하기보다는 기대하지 않았던 팀들이 성과를 내는데 익숙한 방식인 승부조작을 떠올렸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승부조작 청정지역만은 아니다. K리그의 승부조작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 많은 선수들이 징계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고 타 스포츠 종목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목에서는 심지어 감독까지 사법처리되기도 했다.  그 중 축구만 보더라도 월드컵 기간이 아닌, 평소에도 축구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동남아시아건 유럽이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승부조작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승부조작 사건의 기사들을 살펴보면 실체를 파헤친 심층취재는 찾아보기 힘들고 수사기관의 브리핑 복사-붙이기 혹은 추측만 난무하곤 한다. 그만큼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승부조작이고 개인보다는 조직에 의해 행해지기 때문에 취재를 하는 것이 어려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일을 해낸 기자가 불편한 진실을 담을 책을 펴냈다.

승부조작의 진실 / 조작된 승부와 베팅의 세계 그리고 월드컵의 불편한 진실
카테고리 취미/실용/스포츠 > 스포츠
지은이 데클란 힐 (다람,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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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The Fix: Soccer and Organized Crime(승부조작: 축구와 조직범죄)',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승부조작'이 아닌 '승부조작의 진실'로 제목이 정해졌다. 저자인 데클란 힐은 탐사보도 전문 기자로 세계 각국의 승부 조작꾼, 도박 조직, 축구 선수를 포함한 관계자들을 만나 취재를 했다. 승부조작이 행해지는 이유는 단 하나, 돈이다. 불법 토토, 불법 도박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승부조작은 부도덕한 개인이 하기는 힘들다. 그 때문에 배후에는 항상 큰 조직이 있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이 분야의 취재는 매우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저자 또한 위험한 상황을 헤쳐왔고 최소한의 안위를 위한 조치를 취했고,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하자면, 독자들도 이 책의 조사 과정이 매우 위험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특정인의 이름과 날짜를 비롯한 일부 정보를 비공개로 처리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나는 모든 조사 자료를 두 나라에 있는 두 명의 변호사에게 따로 맡겼다. 변호사들에게는 혹시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모든 자료를 공개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해 이 같은 조처를 했다. 독자 여러분이 모든 조사 자료를 볼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이 책에서 밝힌 내용만으로도, 축구계를 거듭나게 하는데 충분하기를 바란다.

축구는 야구같은 타스포츠에 비해 기록으로 정리되는 것이 많지 않다. 스코어와 승리/패배팀, 득점자, 좀 더 범위를 늘려도 도움 정도가 대표적인 축구 기록이다. 하지만 아시아의 불법 도박 조직에서 취급하는 항목들은 훨씬 다양하다. 승리팀, 점수 차, 첫 골/마지막 골 득점자, 첫 골 득점 시간대, 경기 전체 골/헤딩 골 수, 오프사이드 개수 등등이 있다. 저자에 따르면 가장 인기있는 상품은 '아시안 핸디캡'이라고 불리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강팀이 미리 지정된 점수 차 이상으로 이기면 돈을 딸 수 있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A팀 2골차 승리에 돈을 걸었다면 A팀이 2:0이나 3:0, 4:1로 이기면 돈을 딸 수 있지만 비기거나 1:0으로 이기면 돈을 잃는 것이다. 아시안 핸디캡이 인기라는 의미는 '승부조작'이라는 단어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강팀이 어이없이 패배하면서 엄청난 배당률을 독식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저 강팀이 적당한 스코어로 '확실히' 이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팀에게 다음 경기를 지라고 돈을 줄 필요가 없이 어차피 질 것 같은 팀이 '확실히' 지도록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승부 조작꾼들이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승리팀과 점수차를 알려준 경험들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승부 조작꾼들은 아시안 핸디캡만 이용하는 것은 아니라 '점수 맞추기'와 '전체 골 개수 맞추기'도 이용한다. 배당률을 높여 한번에 큰 돈을 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가장 흥미로왔던 사례는 말레이시아 사라와주(州)와 싱가포르 올림픽팀(U-23)의 경기였다. 2006년 4월 12일, 두 팀의 FA컵 8강 경기전, 갑자기 베팅 업체에 전체 골 개수 맞추기 베팅에 많은 돈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 돈들은 일반적으로 많이 나오는 스코어에 기초한 2, 3골에 몰리는 것이 아니라 '9골 이상'에 몰려들었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배당률 덕에 '9골 이상' 항목은 처음 30배 이상에서 경기 시작 직전에는 2.5배까지 떨어졌다. 그 결과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 선수의 증언을 따르자면, 이 소식을 들은 구단 관계자들이 선수 대기실로 쳐들어가서 승부 조작을 단념할 것을 명령했다. 모든 선수는 승부 조작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최선을 다해서 뛰겠다고 구단 관계자에게 약속했다.
경기 결과는? 무너진 배당률이 예고한 대로였다. 싱가포르 올림픽 팀이 7-2로 이겨 총 9골이 나왔다. 싱가포르 풀스(주: 싱가포르 공식(국립) 베팅업체)는 수십만 달러의 손실을 보았다. 해당 경기는 승부 조작이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승부 조작 계획이 누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누설된 정보는 수많은 노름꾼의 무차별적인 '묻지 마 베팅'을 촉발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시아 축구의 신뢰도는 다시 한 번 땅에 떨어졌다.

누군가는 동남아나 아시아에서처럼 수준이 낮은 일부 지역에서만 승부조작이 일어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다른 곳도 다르지 않다. 훨씬 이전부터 축구 리그가 존재했던 유럽도 유구한 승부조작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에 더해 아시아에서 흘러들어온 검은 돈과 승부 조작꾼들에 의해(저자는 메뚜기떼라고 표현한다) 승부조작이 벌어져왔다. 최근에도 승부조작 사실이 밝혀진 유럽 경기들이 380경기가 있었고 그 중에는 자국 리그만이 아니라 챔피언스리그, A매치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 이전에 밝혀진 이탈리아 세리아의 승부조작이나 독일 리그의 조작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수백 경기(한정된 기간 내에 밝혀진 경기만)를 조작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승부 조작꾼들은 그 대회를 가리지 않는다. 축구에서 가장 큰 대회라면 누가 뭐래도 월드컵일 것이다. 메뚜기떼들은 월드컵까지 먹어치울 수 있을까? 전 세계가 몇 년에 걸친 예선을 통과해 4년에 한번씩 밖에 참가하지 못하는 가장 권위있는 축구 대회 본선에서 승부조작이 일어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아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단순히 승부조작이 있다고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다. 본선 경기 전에 이미 승리팀과 점수차를 맞추는 승부 조작꾼을 만나기도 했고, 월드컵이 시작하기도 전에 우승팀을 알고 있었다는 조작꾼을 만나기도 했다.

저자가 월드컵 본선에서 벌어진 승부조작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된 취재는, 그야말로 탐사 저널리즘의 승리다. 승부 조작꾼들이 월드컵 본선 경기를 조작하는 회의를 직접 목격했다. 장소는 무려 방콕의 KFC였다. 그리고 해당 국가 언론인과 승부 조작꾼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뒤 직접 월드컵 대표팀이 머무는 호텔에 찾아가 취재를 했고, 조작이 이루어지기로 한 본선 경기를 직관했다. 두 골 차 이상으로 패배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경기들의 결과는 모두 적중했다. 월드컵 이후 해당 국가까지 무작정 찾아간 저자에게 해당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월드컵을 포함해 다른 대회들에서도 조작꾼들의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고 돈을 받은 일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승부조작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100% 조작이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 팀이 어떤 팀인지, 어떤 경기인지는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 참고로 그 팀은 이번 월드컵 본선에도 출전 중이다.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2008년이었다. 이 후 6년이 흐르는 동안 또 한번의  월드컵, 유로, 올림픽, 챔피언스리그, 각 나라 리그와 컵대회들을 비롯한 수많은 축구 경기가 치뤄졌고, 지금도 월드컵이 치뤄지고 있다. 그 동안 축구계가 얼마나 더 깨끗해졌는지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축구계를 좀먹는 승부조작 문제를 해결하거나, 최소한 해결하려는 의지를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면 결국 승부조작이라는 암은 축구라는 숙주를 죽이고 다른 숙주를 찾을 것이다. '승부조작의 진실'의 가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축구가 죽기 전에 승부조작이라는 암을 치료해야만 한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가치도 있다. 책을 읽고 나면 지금까지와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스포츠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덧. 아래는 원서 표지인데 번역본보다 훨씬 더 책 내용에 맞는듯한데 왜 바꾼건지..

by 청춘한삼 2014. 6. 21. 20:00